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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정평]지정토론 1 : 주제 1 (민족의 화해)에 대해

조회 수 1954 추천 수 0 2004.07.13 11:43:47

<지정토론-Ⅰ주제에 대해>

남북 관계의 회고와 전망

김 종 수 신부(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총장)

1. 시작하는 말

2000년 6월 15일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갖게 한 감격적인 날이었다. 이 날 김대
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한반도의 미래에 관하여 논의한 끝에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을 향한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본 이
날의 분위기는 남과 북이 오랜 분단의 아픔을 씻고 곧 통일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
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통일은 곧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통일 논의는 여러 방면에서 활발
히 진행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으로 이어져 국제적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좋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작년 평양에서 있었던 8.15 통일 대
축전에서 있었던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한 남쪽 정계와 언론의 반응은 통일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 주었다. 새로이 등장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
의 대북 정책 또한 우리의 발걸음을 꽁꽁 묶어놓고 말았다. 더욱이 9.11테러 이후 북한
은 부시 행정부로부터 주요 테러 지원국의 하나, 급기야 '악의 축'으로 지목을 받음으로써
남북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또다시 겨울을 맞게 되었다. 남과 북의 통일 논의에서 흔히
써 오던 '민족 공조'라는 표현도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되는 용
어가 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야기하면서도 '국제 공조'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
게 되었다. 여러 상황들은 암운을 더욱 짙게 할 뿐이었다. 6.15 공동선언 발표 2주년을
맞아 남쪽의 민간 단체들이 북쪽 사람들과 금강산에서 함께 개최한 '민족 통일 대축전'에
서 어떠한 국제적 정세의 변화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서울에서의 8.15 공동행사를 준비하는 등, 통일 논의의 새로운 전환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지만 지난 6월 말 연평도 해안에서 있었던 서해 교전은 남쪽 사회 안에 북쪽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되고 말았다. 전반적인 국민의 정서
가 완전히 부정적으로 기울어져 남쪽 정부도, 민간인도 북쪽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접촉도 해서는 안 된다는 반응들이 나타났다. 쌀이 남아돌아 어찌할 방도를 모르면서도
북쪽에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남쪽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농림부도 올해의 쌀 수매량을 예상하여 창고에 쌓여있는 쌀 가운데 200만 섬을 사료
로 가공하여 처분하고, 또 다른 200만 섬은 아프가니스탄, 이디오피아, 남아공화국 등에
무상 원조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 1조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하였다. 남아도는 쌀을 개, 돼지에게 줄 수는 있어도 북한 사람들에게는 줄 수 없다는 우
리 사고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까지 하였다. 북한에는 먹을 것이 부
족하여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아무리 쌀이 남아돌아도 국제 시장에
서 남의 나라에 쌀을 팔 수 없는 나라이다. 이 쌀을 동포인 북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그토록 나쁜 일이란 말인가?
자연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을 지원해 온 여러 종교 단체들과 민간 단체들에 대한
후원도 급격하게 줄었다. 정부도, 민간인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누가 다시 남북의 닫힌
문을 열 수 있을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서해 교전이 있었지만 7대 종단과 민간 단체들
의 대표가 8.15 서울 민족 공동행사에 관하여 협의하러 평양에 가는 길에 남쪽의 부정적
인 반응을 전하고 8.15 공동행사 서울 개최에 합의하고 돌아 온 다음 날, 북쪽에서 판문
점을 통하여 전화 통지문을 보내 서해 교전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전하고 정부 당국자간
회담의 재개를 제의해 왔다.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정부 당국자간 실무회담을 거쳐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재개되었고, '8.15 민족통일대회'라는 이름으
로 분단 후 처음으로 대규모의 민간 행사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후에도 경제협력추진
위원회와 남북 적십자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고, 지난 9월 7일에는 남북 통일
축구대회도 서울에서 열렸다. 북쪽의 체육인들은 이 달 29일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부산
에서 열리는 아시아 경기대회에도 대규모의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한다. 뿐만 아니라 뱃
길에 이어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길이 열리고 육로도 열린다. 금강산에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상설 면회소가 설치된다. 개성공단도 남쪽의 지원을 받아 건설될 것이다. 놀라운 변
화이다. 자연히 북에 대한 쌀 지원도 따라 오랜만에 한 민족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들이 있다. 너무 빠르다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북풍'이라고 정치적
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북쪽이 먹고살기 어려워 임시 변통의 술수를 쓰는 것이라
고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 가능한 해석들이다. 그렇더라도
남과 북이 화합을 바탕으로 서로 힘을 합쳐 평화를 구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무엇보
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루어 내야 할
우리 모든 국민의 과제이다.

2. 남북 당국자간 합의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당국자들이 여러 차례 만나 회담을 가졌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크게 기억할 만한 남북 당국자간의 합의는 '7.4 남북 공동성명'과 '남북 기본합의서' 그리
고 '6.15 남북 공동선언'이다. 이 세 가지 합의 안에 담긴 내용들을 살펴보면 계속해서 같
은 내용들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합의는 했으나 지켜지지 않아 다시 확인하
곤 한 것이다. 그러한 합의를 보았지만 냉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남과
북의 정치 현실이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 7.4 남북 공동성명
이것은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1972년 7월 4일 이후락 김영주"가 서명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외세의 의존과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 평화 통일을 이룩하고자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고 남북 적십자
회담을 하루빨리 성사시키며 돌발적 군사 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
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고자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설치한다는 것이
다. 이러한 모든 합의가 실천되도록 남북조절위원회 구성과 운영에도 합의를 하였다.
온 국민은 이 공동성명에 놀랐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이고 갑작스럽긴 했지만 너무
기쁜 일이어서 의문스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스스로 책망해야 했다. 하지만 같은 해 10
월 17일 비상조치 선언과 12월 27일 유신 헌법의 공포로 7.4 남북 공동성명의 실천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미 1969년 10월 21일 3선 개헌(제6차 개정)을 한 터이었지만
또다시 헌법을 개정(제7차 개정)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신설하여 여기에서 토론없이
무기명 투표, 과반수 찬성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10.17 비상조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
원을 받들어 ......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 평화 통
일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이 개혁을 단행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 비상조치의 불가
피성을 밝힌 데 이어, 12월 17일 단행된 제7차 개정 헌법인 유신 헌법에서는 개정의 목
적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공고
히 하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데 있다고 전문(前文)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체제 유지를 위한 공안
정국이 더 강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 남북 기본 합의서와 남북 부속 합의서
남북한 교차 승인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년 9월 18일 제46차 유엔 총회)이
이루어진 바로 그 해 12월 13일 또 한 차례 역사적인 남북의 만남 끝에 '남북 기본 합의
서'를 이끌어 낸다. 이번에는 "남북 고위급 회담 남측 대표단 수석대표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북남 고위급 회담 북측대표단 단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
형묵"이 서명하였다.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상부의 뜻을 받들어 1972년 7월 4일 이후
락 김영주"라고 했던 것에 비하면 많은 진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유엔에도 동시 가입
을 하고 난 뒤인지라 서로 국호를 밝혀 서명을 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다. 남과 북이 앞으로 어떤 입장과 방향에서 통일 논의를 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
할 때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남북 기본 합의서는 이러한 인정을 바탕으로 작성
되었다.
남북 기본 합의서는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밝힌 바 있는 조국 통일 3대 원칙을 재확
인하고 있으나 남북 화해와 남북 불가침 그리고 남북 교류 협력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체적인 목표들을 이행하고 준수하고자 그 이듬해 1992년
9월 17일 '남북 부속 합의서'를 작성한다. 여기에서는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내
부 문제 불간섭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더 이상 '괴뢰 정권'이라는 표현은 서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남북 관계사의 역사적 문서로만 남게 된다.

3) 6.15 남북 공동선언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은 평양을 방문하여 조
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감격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
루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서명
하였다. 이 공동선언은 모두 5개 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에 앞선 '7.4 남북 공
동성명'과 '남북 기본 합의서'와 비슷한 것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직
접 평양을 방문하여 북의 정상을 만나 합의하고 서명한 공동선언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에 앞선 합의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문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공동선언에 대한 우려와 반대 의견들도 적지 않지만 이를 실천하여
남과 북의 화합을 이루고 결국에는 평화 통일을 이룩하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많다. 분명
한 것은 이전과는 달리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에 남과 북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실제적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3.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의 민간 교류

정부간 대화는 단절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종교와 민간 단체들은 북
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여 왔다. 남북의 상황 변화에 따라 속도와 규모의 차이는 있었을지
라도 북이 1995년 큰물 피해로 극도의 경제적 위기에 놓여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국제
사회와 더불어 남쪽의 여러 단체들과 종단들은 북한을 지원하기를 계속하여 왔다. 부분적
으로 학술 교류도 이루어졌고, 경제인들의 평양 방문도 잦았다. 이러한 지원과는 별도로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총체적으로 남북 문제를 해결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니 그
것이 사회 시민단체와 종단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 공동행사 추진 본부'이다. 이 추진
본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6.15 공동선언 1주년을 맞아 금강산에서 통일의 의지를 다지
는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 대토론회'를 가졌다. 이 대회는 우리 남쪽 사회에
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하였으나 북쪽에서는 1948년 김구 선생이 이끌었던 평양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니는 행사로 평가하였다.
2001년 6월 15일 금강산에서 가졌던 '6.15 민족통일 대토론회'에는 남쪽 대표단 200
여 명과 참관단 200여 명 그리고 북쪽에서는 대표단 100여 명과 행사 일꾼 3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토론회에서 남과 북의 참가자 일동은 남북이 힘을 합쳐 6.15 공동선언의
실천을 위하여 계속하여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천명하였다.
금강산 민족통일 대토론회에 이어 8월 15일에는 평양에서 민족통일 대축전을 공동으
로 개최하였다. 이 대축전에는 남쪽에서 316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기자들도 21명이
나 수행, 취재하였다. 그러나 이 민족통일 대축전은 대규모의 남쪽 대표단이 평양을 찾았
던 행사였지만 북의 3대 헌장 기념탑에서 가진 개폐막 행사와 만경대 방명록 사건 등으
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없는 행사가 되고 말았다. 남쪽의 언론 보도와 부정적 반응
에도 평양에 가 있었던 대표단 집행부의 노력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통을
거듭한 끝에 이 행사를 마치며 발표한 '2001년 민족통일 대축전 공동 보도문'은 이 행사
의 성과와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정부간 합의문이나 공동 보도문에서도 결코 쓰지 못
했던 "평화 정책"을 위하여 남과 북의 민간 단체들이 힘을 모아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든
지 민간 교류의 중요성을 서로 깊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평양에서 가진 '8.15 민족통일 대축전'에 대한 남쪽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추진본부는
남과 북의 대화 진전을 위하여 계속하여 노력하여 왔다. 정부간 대화가 단절된 뒤에도 금
강산과 평양을 오가며 어떻게든 대화를 계속하려 노력했다. 2002년 새해를 맞이하며 공
동행사를 가지려 했으나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테러 사태가 가져온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이 행사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추진본부는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2002년 6월
15일 금강산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 2주년 기념 민족통일 대축전을 열어 남과 북이 공
동으로 한반도에서의 전쟁 불가 선언을 하고, 이미 합의한 8.15 서울 민족 공동행사 개최
를 확인하였다. 뒤에 평양에서 실무회담을 거쳐 북쪽 대표단의 서울 행사 참가를 거듭 확
인하였다. 북쪽 대표단의 서울 행사 참가에 대하여 서울의 언론과 국민 여론의 반응은 회
의적이었다. 그러나 북은 예술인 43명을 포함하여 116명의 대표단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서울 행사는 문화 체육 행사를 중심으로 남과 북의 화합된 분위기를 보여 주려 하였
으나 우리 정부의 우려로 제한적인 행사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북쪽 공연단의 코엑스
오디토리움 공연을 제외하고 모든 행사를 워커힐 호텔 안으로 제한한 것은 대단히 유감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일을 하는지 철저하게 차단
하고자 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나치게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마음을 상한 적이 많다.

4. 북한의 경제적 위기와 대북 지원

남북 분단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북한이 우리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더 우위에 있었
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북한 경제는 장기적인 하락을 거듭했다. 이러한
북한 경제의 하락은 불합리한 경제 구조와 정치 체제 그리고 대외 무역의 급격한 감소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래된 현상이지만 1995년의 홍수는 북한의 구조
적인 식량 부족으로 경제적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북한 유엔 대표부는 유엔 인도
지원국(UNDHA)에 긴급 구호 요청을 하였고, 세계보건기구(WHO)에 의료진 파견과 유
엔 아동기금(UNICEF)에 미화 5만 달러 상당의 콩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요청에 국제 기구들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였고, 이러한
호소에 국제 사회는 다방면에 걸쳐 북한을 지원하게 되었다. 유엔 기구뿐만 아니라 비정부
기구, 개별 국가 등으로 지원 주체가 확대되었다.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국제 사회는 1995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15억 1천 8백
9십 3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같은 기간에 4억 5천 5만 달러를 지
원하였다. 이외에도 민간 단체의 지원과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지원을 합하면 정확한 대
북 지원액을 산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별 국가별로 볼 때 통일의 주
체국인 우리 나라에 비해 미국이나 일본의 지원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우리 나라 정부가 북한에 '퍼주기식 지원'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비공
식 지원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고, 위의 통일부 통계에 따라 우리 정부가 지
난 6년 동안 지원한 4억 5천 5만 달러를 4,700만 국민으로 환산하면 1인당 9.57달러에
불과하고 이를 최근의 우리 환율로 계산하면 11,490원에 불과하다. 이를 또 6년으로 나
누면 1인당 1년에 1,915원을 지원한 셈이다. 김대중 정부가 2001년을 제외한 집권 4년
동안 지원한 액수는 3억 8천만 달러라고 하니 이 정부의 지원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이
를 '퍼주기식 지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군사적으로 전용했다고 한들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북한은 군사 경제와 인민 경제를 분리하고 있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은 훨씬
줄어든다. 평화 비용에 대한 국민적 이해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5. 북한의 변화

북한은 이제 '고난의 행군'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경제 부흥 시대를 추구하고 있다.
올해 4월 말부터 7월 말까지 계속되었던 북한의 '아리랑 축전'은 그러한 의미에서 청산과
도약의 의미를 지닌다. 북한은 이제 경제적 도약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를 모범
으로 사회주의의 건재를 과시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중국을 모범으로 한 일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과 러시아 방문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최근의 북한의 경제 개혁 조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남북 관계 진전의
커다란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7월 1일, 오랜 배급제를 제한적으로 운
영하고 세금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북한 주민들은 월급을
받아 집세, 물세, 전기세 등을 납부하고 식량을 구입하는 등 생활 필수품을 구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월급을 절약하여 모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경제 개혁 조치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경제적 부의 혜택을 더 줌
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켜 북한의 경제 부흥을 이룩한다는 것이 경제 개혁 조치의 기본 목
표이다. 이러한 개혁 조치는 북한 사람들에게 염려와 걱정을 안겨주기도 하였지만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였다. 그들의 표정에서 의욕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경제 개혁 조치의 성공을 위하여 북한은 노력하고 있다. 우리 남쪽과 적극적으
로 대화에 나서고 경제 협력을 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북한의 경제 개혁 조치의
성공은 우리 한민족의 통일 준비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북한 경제 개
혁의 성공을 위하여 어떤 국제 사회보다도 우리의 협력과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것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지
원한다는 것은 땅 바닥에 물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항아리에 물을 조
금씩 채워 가는 것과 같다.

6. 전망과 우리의 다짐

앞으로 남북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또 어떻게 진전을 이룰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최근의 남북 관계는 곧 상당한 진전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게 하지만 이제까지의 과거를
돌아볼 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질그릇 같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지속적
인 대화와 교류 협력이 이어질 때 국민은 지지를 보내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햇볕 정
책'을 구사하며 국민들을 설득해 왔다. 하지만 국민은 이 정부의 대북 정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 관계가 급진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우려
의 시각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북한의 인사들을 만난 경험을 토대로 최근의 남북 관계를 판단할 때 북
한의 태도가 그들의 필요를 일시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한낱 겉꾸밈에 지나지 않을 것이
란 우려를 기우로 보고 싶다.
9월 18일 동해선과 경의선 연결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산 관
광을 위한 육로가 열린다. 개성공단 건설로 실질적인 남북 경제 협력 체제를 구축하게 된
다. 이산 가족 상설 면회소 설치로 마음의 장벽을 허물게 된다. 민간 단체들은 가능한 범
위의 모든 교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학술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계 진전을 정치
적 술수로 몰아 세워서는 안 된다. 정치인을 막론하고 모든 국민은 이러한 여러 교류 협
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통일은 절대 불가
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한 쪽이 준비가 덜 되어 있다면 참고 기다리고 신
뢰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다른 한 쪽도 이에 부응한 응답을 한다. 한 쪽이 언제 부정적
인 인상을 주었거나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부정적인 생각
에서 벗어나 신뢰를 보이면 그에게서 같은 신뢰를 보게 된다. 이러한 신뢰는 관계를 발전
시킨다.
세월은 필요하지만 통일의 날은 꼭 온다.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고 전망이 어둡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끝이 보인다면 우리는 그 끝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고 또 가야 한다.
우리의 평화와 통일은 우리의 손으로 이룩해야 한다. 다른 어떤 나라도 우리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 남북 문제는 우리의 과제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모든 국민은 남북 문
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맡게 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우리의 과제이다. 어
떤 정치인도, 어떤 종교인도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노를 삭히고 우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국제 정세도 우리를 어렵게 하지만 북쪽 사람들과 접촉하면서도 통일은 참 어려운 문
제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50년의 세월은 우리를 한참 다른 사람들이 되게 하였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생각과 이해가 다를 때가 많다. 북쪽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달라졌
다고 느끼면서도 어떤 때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다. 거기에 따른 행동도 달리 나타난다. 혼돈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시 전반적으로 보면 역시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을 보고
또다시 힘을 내어 길을 걷는다.
우리 교회의 남다른 노력도 필요하다. 때로는 사회의 반응과 무관하게 갈 길을 가야하
고, 때로는 사회의 반응을 주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도 이른바 '보수'의 길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보편적이라 하지만 민족의 아픔을 무시하면서까지 보편적일
수는 없다. 북한의 태도가 밉다고 북한을 위해서는 기도도 안 한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
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 교회는 구 소련과 동구의 변화를 위해서 온 세계 교회가 연
대하여 기도해 왔다. 그리고 그 구 소련의 붕괴는 곧 우리 기도의 결과라고 믿었다. 그런
데 왜 북한을 위해서는 기도도 하지 않으려 하는가?
물론 각 교구별로 민족화해위원회가 활동하고 있고 또 기도도 하고 있지만 이제는 위
원회 차원을 넘어서 교구 차원에서 그리고 전국 차원에서 모든 이가 남북의 화해와 통일
을 위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을 하다 보면 너무도 인간적인 힘
에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들이 있다. 그리고는 그 인간적인 능력만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게 된다.
우리 모두 구 소련과 동구의 변화를 위해 바쳤던 기도를 이제는 단 하나의 분단국인
우리 나라를 위해 바치자. 아무리 미워도 기도하면서 사랑하자. 기도로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화해와 협력의 길을 찾고, 그 길 끝에서 통일의 기쁨을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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