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slider01 slider02 slider03 slider04
중서울지구형제회

 

1) 주보성인 : 둔스 스코투수

2) 설립년월일: 1994.04.17

3) 평의회 장소 :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서울지구사무실

                        지구사무실: 서울시 중구 정동 17 프란치스코 교육회관201호
                        전화 02-779-3881/ FAX 779-3721 E-mail: ofseoul@hanmail.net

4) 영적보조자 : 우영성(안토니오)-ofm. 정진철(마르코)-ofm conv. 방영진(마태오)-ofm cap.

5) 형제회조직 : 2011년 3월 20일 현재 19개 단위 형제회로 구성되어 있다.레오(동작구), 안토니오(영등포, 구로, 금천구), 루도비코(관악구), 실베스텔(강남), 클라라(성동, 송파), 맛세오(강동, 광진), 토마스 모어(강서, 양천), 프란치스코(용산, 마포, 중구), 루피노(서대문, 은평), 엘리사벳(동대문 중랑), 보나돈나(노원, 도봉), 루케치오(성북, 종로), 야고바(서초구), 꼴베(Conv.),보나벤뚜라(Conv.),비안네(Conv)요셉(Conv,)비오(카푸친),아씨시(준) 마석클라라의집으로 구성되어있다.


6) 형제회 소개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시작과 서울 형제회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1937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성당에서 시인 정지용을 비롯한 28명(남13, 여15)이 12월 25일 입회(착의식)함으로써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때 회원은 뉴욕 맨하탄 성 요한성당에서 입회 서약(1921. 입회/서약 1922.9.24)한 장면 요한과 장발 루도비코(1922. 입회/1923.12.30 서약)형제, 그리고 백동(혜화동), 종현(명동), 약현(중림동), 영등포 네 성당의 지식층 유지들이었다.


1939년 1월 3일 백동성당에서 20명(남9, 여11)의 회원이 도 요한신부의 집전으로 첫 서약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교회법적 요건을 구비한 서울형제회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정규형제회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때 초대 지도신부는 오기선 요셉신부였으며 초대 회장은 장면 요한이었다.
  백동 주임신부로 재임 중이던 오기선 요셉신부와 풍수원 성당에 재임 중 요양 차 종현성당 주교관에 머물고 있던 이광재 디모테오신부가 한국에서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입회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었다. 두 사제는 1937년 9월 28일 서울대목구 원 라리보 주교경당에서 프란치스코,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으로 입회하였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두 사제는 도 요한신부의 도움으로 재속회 조직의 권한을 위임 받아 재속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그 후 명동성당 주임신부로 재임 중이던 노기남 바오로신부가 재속회에 입회하였고 당시 회원수는 수련자를 포함하여 60여명이었다. 정규 형제회로 발족한 서울형제회는 회원이 날로 증가하여 1941년에는 회원수가 400여명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을 비롯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초대 회장 장면박사가 서거하는 등 시대적 어려움가운데에서도 회원은 계속 증가하여 1966년 4월 17일에는 한강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두 번째 재속 프란치스코회인 대방동형제회가 설립되었고 초대 지도신부는 오기선 요셉, 초대 회장은 박장수 베네딕도였다. 그 이후 두 형제회는 회원수가 계속 증가하여 1992년에는 서울형제회 1,602명 대방동형제회 1,423명으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3,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회원수의 증가로 집회장소, 교육장소, 회원관리, 친교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여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정체성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따라서 형제회를 쇄신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국가 영적보조 유영진 루카신부는 두 형제회 영적보조를 겸임하고 있으면서 비대해진 형제회의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쇄신하기 위하여 양쪽 형제회를 통합하여 4개 형제회로 분할하기로 하고,  1993년부터 서울 지구형제회 설립 계획을 준비하여 그해 9월 24일 국가형제회(제 93-26)의 승인을 받아 1994년 4월 17일 서울 지구형제회를 설립하였다.
 ❏ 1937년 재속프란치스코회 설립 당시에는 집회 시에 수도복을 입었으며 서약 시에는 수도명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