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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FS 역사/연혁

한국 OFS 역사/연혁

T 일본의 조선인 재속3회원

한국의 첫 재속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하여 서약한 장 면(요한)입니다. 그러나 4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인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전교를 하고 있던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회원들의 가르침을 받아 많은 조선인들이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했습니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코 재속3회원이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또한 1867년 7월 2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205위 중 두 명도 한국인 프란치스코 재속3회원이었습니다. 같은 날 순교한 이들은 파스칼 보스와 가이오리 에몬입니다. 따라서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역사에 있어 그 첫 자리는 일본에서 3회원이 된 순교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관련연혁

1921.             첫회원 : 장면(요한) 미국 뉴욕 세자요한 성당에서 루드거(Ludger, ofm cap.) 신부 집전으로 프란치스코 3회 입회
1922. 9. 24     장면(요한) 뉴욕 세자요한 성당에서 서약
1923. 12.30     장발(루도비코) 서약

 

 

T 형제회 창설기(1937-1941)

 

장 면, 장 발 형제의 3회 입회장면박사

 

한국 교회가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입교로 시작되었듯이 한국 재속프란치스꼬회 역시 1회가 이 땅에 프란치스칸 씨앗을 심기 전에 이미 프란치스코 재속3회 서약을 한 장 면(요한), 장 발(루도비꼬) 형제에 의해 기묘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장 면(張勉, 세자 요한, 1899∼1966)은 미국 뉴욕 맨하탄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회가 사목하는 성 요한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매료되어 1921년 3회에 입회하였으며 1922년 9월 24일 수도명을 프란치스코로 서약하였습니다. 또한 동생 장 발(張勃, 루도비꼬) 역시 1922년 3회에 입회하여 1923년 12월 30일 수도명을 가브리엘로 서약하였습니다. 이들은 유학을 마친 후 입국하여 혜화동 성당 신자로서 서울 교구와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고, 또한 사부 프란치스코의 향기가 되어 많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조선 진출과 오기선, 이광재 신부의 입회

 
프란치스코회는 1937년 9월 15일 도 요한(Jean-Joseph Deguire), 배 쥐스땡(Justin M. Bellerose) 형 이광재 신부님제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건립하여 지원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오기선(吳基先 요셉, 1907∼1990) 신부는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하여 재속에서 사부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수원 본당에 있다가 요양 중이던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1909∼1950) 신부에게도 입회를 권했습니다. 그리하여 1937년 9월 28일 서울에 온 도 요한(Deguire) 신부의 주례로, 원 라리보 주교 경당에서 오기선 신부(수도명 : 프란치스코)와 이광재 신부(수도명 : 안또니오)가 한국 사제로는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신부는 도 요한 형제의 도움으로 형제회 조직의 권한을 위임받아 3회원인 장 면, 장 발 형제와 함께 당시 교회 지도층이 많았던 백동(현 혜화동) 성당을 중심으로 형제회 창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첫 형제회 창설

목포에 사는 김익진(프란치스코)가 1937년 11월 19일 오기선 신부의 주례로 입회하여 단독회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대전의 도 요한, 배 쥐스땡 신부의 적극적인 호응과 오기선 오기선신부, 장 면, 장 발 형제의 도움으로 서울교구의 종현(명동), 약현(중림동), 백동(혜화동), 영등포 네 본당에서 명망 있는 교우들이 3회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시인 정지용(鄭芝鎔, 6. 25 때 납북)을 비롯하여 28명(남 13명, 여 15명)이 1937년 12월 25일 오기선 신부의 주례로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첫 착의식(현 입회식)을 가졌습니다.
오기선 신부는 입회자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혜화동 성당에서 매월 첫 주일 오후 3시에 정기적인 집회를 갖고, 수련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오기선, 이광재, 도요한, 배유스틴 신부에게서 개별지도를 받고 단독회원으로 입회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기선 신부는 입회한 회원들을 이끌면서도 작은형제회에 재속3회 규정의 지도를 청하고 1938년 11월 15일 대전목동에서 도요한 신부 주례로 서약하였습니다. 1938년 12월 25일에는 제주 교육의 별인 최정숙(베아트리체)이 혜화동 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입회하였습니다. 역사3 혜화동 허원식.png
이어서 1939년 1월 3일, 혜화동 성당에서 도 요한 신부 집전으로 20명이 서약을 했습니다. 오기선 신부의 형제회 창설 노력으로 1939년 1월 3일 원 라리보 교구장으로부터 형제회 창설 승인을 받아, 성 프란치스코를 주보성인으로 하는 ‘서울 형제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초대회장은 장면(요한)이고, 초대 지도신부는 오기선 신부였습니다.

당시 대전에는 도 요한 신부의 특별한 지도를 받고 재속3회 회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미혼 여성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1939년 당시 서울 형제회는 수련자를 포함하여 60명의 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전 목동 지역에는 형제회 조직은 없었으나 목동 성당을 중심으로 약 25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형제회는 형제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부 교회지도자들로 교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회원들은 평신도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던 당시의 교회 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관련연혁


1937. 9. 28 오기선(요셉), 이광재(디모테오) 신부, 종현(명동) 주교좌 경당에서 3회에 입회하여 첫 사제회원이 됨
1937. 12.25 첫 착의식(입회식), 혜화동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28명 입회
1939. 1. 3 서울형제회 설립, 초대회장 장면, 초대지도신부 오기선, 주보 성프란치스코

 

  

 

T 시련기(1941-195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적국인 미국과 유럽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한국인들에게 더욱 압박을 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평양, 광주, 춘천에서 사목하던 외국인 성직자가 체포, 구금되고 대전 목동에 있던 프란치스코회 성직자, 수도자들이 일본군에게 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1942년 2월 15일에 오기선 신부까지 신의주 본당으로 가게 되어 전국 회원들을 지도할 수 없게 되었고,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회를 하지 못했으며 회원 간의 친교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오기선 신부는 ‘평화와 행복’이라는 회보를 발행하여 전국 회원들을 지도하였습니다. 1944년 오기선 신부는 다시 대전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대전 지역 형제회원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온 나라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피살되었고, 1950년 10월 8일에는 원산 방공호에서 이광재 신부가 총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망 있는 회원들이 많이 납북되어 형제회는 지도 신부와 임원들을 잃고 집회가 중단되어 1953년 7월 휴전 협정까지 공백 상태로 있었습니다.

T
관련연혁

1942. 2. 15 오기선 신부 신의주 본당 부임 후 평화와 행복 회보지 발간
1950. 10. 8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순교
  
T 회복기(1953-1972.8)

형제회 조직과 전국대회

9․28 수복으로 공산군이 물러가자 교우들은 다시 성당에 모여 어지러워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1945년에 파견된 배 쥐스탱 신부에 이어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계속 입국했고, 그들은 재속3회원들을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60년대에 조직된 형제회는 대부분 충남지역이었습니다. 한국에 새로 입국한 공 안드레아 신부는 그 당시 대전의 오기선 신부와 함께 적극적으로 형제회를 도왔습니다. 공 안드레아 신부는 대전과 전라도 지역 회원들을 위해 애썼으며 흩어져 있던 단독 회원들을 모아 형제회를 결성하는데 주력했습니다.
1958년 12월 10일 대전 대흥동 형제회가 서울 형제회에 이어 두 번째 형제회로 조직되었습니다. 이어 당진군 합덕 신리에서도 형제회 조직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도 형제회 창설 움직임이 일어나 1961년 3월 12일 부산형제회가 탄생했습니다. 다시 대흥동 형제회에서 목동 형제회가 분할하고 인천, 김제, 당진에서도 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전국에 형제회가 많아지자 공 안드레아 신부는 제1차 전국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한국 진출 25주년을 맞이하여 첫 전국 대회가 1962년 9월 대전 목동 수도원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전국 8개 형제회에서 35명이 참가한 이 대회의 주제는 ‘평화와 선’이었으며, 전국 형제회 상황이 처음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이 전국적 모임은 서울 형제회와 여러 형제회에 활기를 주었습니다. 이 때 교육과 양성을 위한 잡지 ‘발자취’를 창간하고, 재속3회원을 표시하는 휘장도 만들었습니다. 1963년부터 ‘발자취’는 계간지로 발행하였습니다.

한국연합회 발족과 초대 연합회
1963년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제2차 전국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때 한국연합회가 발족되었으며, 초대 지도 신부로 공아영(안드레아) ofm 신부, 한국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장면(요한)이 선임되었습니다. 이어 초대 연합회 주관의 전국대회가 이듬해인 1964년 9월 대전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제2대 전국 지도신부로 최근성(베드로) ofm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1965년 안선호(베다) ofm 신부는 제3대 지도 신부가 되었습니다. 안 베다 신부님은 형제회 피정 지도와 운영에 힘썼습니다. 1965년 9월 제4차 전국대회가 열렸고 ‘3회원의 사도직’이란 주제를 내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쇄신과 평신도에 대한 자각이 높아진 데에 따른 재속3회원의 사도직 역할을 연구했습니다.
1966년 6월 4일에 초대 회장이었던 장면이 67세로 선종했습니다. 이 아뽈리나리스 총장대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소 프란치스칸으로 항구하게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간 그에게 1회 수도자만이 쓰는 수도복 모자(Capuce)를 하사하였습니다. 연합회는 그 후 6년간 공백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1967년 6월 2일, 서울 형제회가 분할하여 대방동 성당에 안토니오 성인을 주보로 하고 오기선 신부를 지도 신부로 하여 형제회 창립 총회를 가졌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설립 형제회 탄생
1958년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국내에 진출(1958. 10. 6)하여 3회를 조직하고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꼰벤뚜알의 지도로 1965년 10월, 당시 대구 범어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지세암(로코) 신부와 본당 주임 황 마리오 신부가 ‘성 프란치스코 재속3회’의 설립을 의논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형제회 설립 후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회의 지도로 1969년 대구시 범어동 본당을 중심으로 꼰벤뚜알 설립 형제회가 창설되었습니다.
한편 꼰벤뚜알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전인 1940년 2월, 대구교구의 박재수(요한) 신부가 단독회원으로 대전 목동에서 도 요한 ofm 신부의 주례로 입회하였고, 재속3회에 대한 지도 권한을 받아 열성적으로 활동한 덕분에 본당 신자 대부분이 재속3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1962년 박재수 신부는 전국연합회 지도신부인 공 안드레아 신부와 상의하여 1962년 10월 16일 안토니오 성인을 주보로 대구 남산동 성당에 재속3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안토니오 형제회는 한 때 회원이 600명이나 되어 각 소속 본당에서 월례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형제회에 적을 둔 회원이 무려 2,400명이나 되었고, 마산, 창녕, 진해, 왜관 등지에서까지 형제회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오 형제회 초대 회장(1962. 10. 16 - 1963. 9. 1)은 단독회원 서약을 했던 김익진(프란치스코) 형제였습니다. 1970년부터 안토니오 형제회는 대전 목동수도원에서 개최된 ‘한국 성 프란치스코 재속3회 연구회’에 참석하는 등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OFM) 설립 형제들과 교류를 가졌고, 전국 지도신부였던 공안드레아 신부를 피정에 초대하는 등 자치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관련연혁

1958. 12. 10 대전 대흥동 형제회 설립
1961. 3. 12 부산형제회 탄생, 이후 인천, 김제, 당진에 형제회 설립
1962. 9. 18-21 제1차 전국대회 및 한국 전래 25주년 기념식(대전 목동수도원, 8개 형제회 35명 참가)
1963. 9. 17-20 제2차 전국대회 개최, 전국 연합회 창설, 대전 목동수도원 - 초대 회장 : 장면(요한), 지도신부 : 공아영(안드레아) 신부
 1966. 6. 4 초대 회장 장면(요한) 선종
1970. 8. 25-27 ‘프란치스코 재속 3회 연구회’ 개최, 대전 목동수도원
1972. 7 제4대 지도신부 공아영(안드레아) 신부 취임
1972. 8. 20 제6차 전국대회 개최 및 제2대 연합회(회장 : 이순석 바오로) - 연합회 규약초안 제정
내용 - 단독 회원제와 수도명 폐지,
- 서약이 유기와 종신으로 구분됨. 연합회 월보 발행
-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성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 명칭변경 

 

T 재건기(1972-78년)

연합회의 재기 - 제2대 한국연합회(1972. 8.~1975. 8.)
초대 연합회가 공백 상태에 머무르게 되자 서울 형제회가 지방 형제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국 지도신부 공안드레아 ofm 신부는 연합회 재건을 위해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이순석(바오로)를 회장으로 하는 제2대 연합회를 발족했습니다.

1972년 연합회는 제6차 전국대회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의 변화에 맞게 단독회원제와 수도명을 폐지하였고, ‘프란치스코 재속3회’를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로 변경하였습니다.

연합회는 1972년 9월 15일, 서울 형제회의 월보 ‘평화의 사도’ 이름을 인수하여 창간호를 냈습니다. 또한 입회식에서 성의와 띠를 착용하던 것을 뱃지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서약자들이 수도복을 입는 규정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7차 전국대회는 1973년 대전에서 총회와 함께 처음으로 수련장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꼰벤뚜알 설립 형제들과 작은형제회 설립 형제들이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하다가 두 영적지도자들의 노력으로 하나의 연합회 안에 속하기로 결의하고 전국 행사가 있을 때는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서울형제회는 1973년 6월 9일, 회원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기 위한 ‘형제 상호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령회원이 대부분인 형제회에 기둥이 되어주길 바라며 청장년 형제회를 만들었습니다.

제3대 연합회(1975. 8. - 1978. 8.)
대구 범어동 꼰벤뚜알 수도원에서 가진 제9차 전국대회에서 다시 이순석(바오로)을 회장으로 하는 제3대 연합회가 출범하였습니다.

1974년 9월 15일 대구 범어동에서 엘리사벳 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75년 1월 21일 마산 지역에도 재속형제회 창설을 위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당시 80 고령의 마산교구 은퇴 신부인 정수길 신부의 노력으로 1976년 7월 19일 드디어 마산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2명의 교구 사제가 3회에 입회 하였습니다.

1976년 2월 부임한 제5대 지도신부 최정오(마리노) ofm 신부는 1978년까지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단위형제회의 지도자들을 위한 강습회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형제회가 이 시기에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형제회는 서약회원 3명만 있으면 형제회 조직을 하다 보니 내실을 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교육자료와 월보 발행 등을 계속하면서 1976년 지구 협의회를 구성하였습니다.
1977년에는 부산 대연동 성당에서 꼰벤뚜알 황 마리오 신부가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부산 대연동 안토니오 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전국에서 많은 형제회가 설립되었고, 지역 형제회의 유대를 위해 1976년 5월 전북 지구협의회(현 전주지구형제회)가 조직되었고, 사부님 서거 750주년 기념식과 전국대회가 전주에서 열렸습니다. 1977년 7월 전남 지구협의회(현 광주지구형제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관련연혁


 1975. 8. 22. 제9차 전국대회에서 제3대 연합회(회장 : 이순석 바오로)
 1976. 5. 1 전북 지구협의회 조직(현 전주지구형제회)
1977. 7. 14 전남 지구협의회 조직(현 광주지구형제회)
1978. 2. 12 제1차 전국 지도자 연수회 개최
1978. 8. 27 제12차 전국총회에서 제4대 연합회(회장 : 김옥윤 요한)


 


T 제1성장기(1978-1993년)

제4대 연합회(1978. 8. - 1981. 10.)
1978년은 국내외적으로 3회에 큰 전환점이 되는 해였습니다. 변천하는 새 시대에 부응하며 개정된 회칙이 인가를 받고, 그 명칭도 종전의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서 ‘재속프란치스코회’로 변경되었습니다. 4대 연합회는 김옥윤(요한)을 회장으로 하고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당시 전국 지도신부는 이종한(요한) ofm 신부였습니다. 연합회는 주로 교육에 주안점을 두어 지도자 연수회와 수련장 연수회를 개최하였고, 청년 프란치스칸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젊은이의 모임을 개최하여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제5대 연합회(1981. 10.-1984. 9.)
1981년 6월 13~16일 국제평의회 마누엘라 마찌올리 회장이 처음으로 방한하여 한국의 형제회를 살펴보았습니다. 김옥윤(요한)이 선거총회에서 다시 선출되어 제5대 연합회를 이끌었습니다. 연합회는 1982년 사부 탄생 8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추진한 출판사업과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전국형제회는 당시 주로 작은형제회의 영적보조를 받고 있었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적 보조를 받는 형제들과 빈번한 교류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8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영적보조를 받는 부산과 대구의 형제회들이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재속형제회 한국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1983년 김옥윤 회장은 이 형제들과 서로의 발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협의했습니다.
1983년 5월 29일 제주교구의 이태수(미카엘) 신부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임피제(바드리시오) 신부가 제주 글라라 수녀원에서 하멜키올 신부 주례로 입회를 하였습니다.

제6대 연합회(1984. 9-1987. 10.)
제6대 연합회는 박상배(마태오)를 회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연합회는 새로운 정신과 각오로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를 확고한 바탕 위에 놓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5년 5월 9대 전국 지도신부로 임명된 김창재 (다미아노) ofm 신부는 전국 형제회의 재정비를 위해 형제회 시찰을 강화하고 연합회는 지도자 연수회와 젊은이 모임을 연례행사로 실시하였습니다. 또 장년모임과 수련장 학교, 전국 입회․서약의 강화 등 형제회 활성화와 양성에 주력하였습니다.
1986년 2월 14일 꼰벤뚜알 설립 형제들과 작은형제회 설립 형제들 간의 일치를 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연합회는 작은형제회와 함께 1987년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 전국 대회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었습니다. 전국의 형제들이 함께 기금을 만들고 정성을 모아 봉헌했던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이 1987년 4월 22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제7대 연합회(1987. 10-1990. 10.)
1987년 10월 3~4일 제15차 전국 총회가 개최되어 박상배(마태오) 회장이 유임되었습니다. 1988년 1월 연합회는 전국 평의회를 열고 수도복 폐지를 결정하였습니다. 1988년 2월 국가형제회는 김창재(다미아노) 지도신부의 도움으로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역사서 ‘평화의 사도’를 발간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제주교구 양명현(토마) 신부가 사제회원으로 입회하였습니다. 1988년 10월 제10대 전국 지도신부로 류이규(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1989년 6월 28일에 대전지구협의회(현 대전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제8대 연합회(1990. 11.-1993. 11.)
1990년 11월 제16차 전국 총회에서 김종학(아오스딩)이 회장으로 선출되어 제8대 연합회가 출범하였습니다. 1991년 2월 제11대 지도신부로 유영진(루카)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1991년 6월 15일 경남지구협의회(지금의 경남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같은 해 9월 국제평의회 엠마누엘라 데 눈치오 회장과 총영적보조자 칼 쉐이퍼 신부가 방한하여 전국 연합회를 방문하였습니다. 1990년 새 임시회헌이 발효됨에 따라 1992년 1월 전국 연례회의에서 그동안 사용하던 명칭들을 변경하기로 하였습니다. 한국 연합회는 ‘한국 국가형제회’로, 지구 협의회는 ‘지구형제회’로, 지도신부는 ‘영적보조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992년 3월 21일 부산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과거 포켓판의 지침서를 회칙과 회헌을 실어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로 새롭게 발행했습니다.

관련연혁

 1979. 2 제6대 지도신부 이종한(요한) 신부 취임
1980. 8. 2-3 꼰벤뚜알 재속프란치스코 형제회 창립총회 및 연합회 발족
1981. 6. 13-16 국제평의회 회장 마누엘라 마찌올리 방한
1981. 10. 17 제13차 전국총회 개최, 제5대 연합회(회장 : 김옥윤 요한)
1982. 12 제8대 지도신부 이종한(요한) 신부 취임
1984. 9. 30-10. 2 제14차 전국총회 및 제7차 전국 지도자 연수회 개최, 제6대 연합회(회장 : 박상배 마태오)
1985. 5 제9대 지도신부 김창재(다미아노) 신부 취임
1987. 1. 1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개막미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이종한(요한) 관구장과 김창재(다미아노)  지도신부 주례로 거행)
1987. 6. 21-27 제1기 수련장 학교 개설(6박 7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1개 형제회 42명 참석)
1987. 8. 1-5 제1차 장년의 모임 개최
1987. 9. 24-10. 7 세계 지도신부 칼 쉐이퍼(Carl Schäfer, OFM) 신부 방한
1987. 10. 2-3 50주년 기념대회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9개 형제회 800여명 참석, 미국 L.A, Chicago 형제회 및
Conv. 형제회에서 다수 참석)
1987. 10. 3-4 제15차 전국총회 개최, 7대 연합회(회장 : 박상배 마태오)
1987. 12. 27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폐막미사(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988. 1. 8-10 제13차 지도자연수회(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988. 2. 29 50주년 기념집 <평화의 사도> 발행
1988. 9. 18 연합회 25주년 기념식 - 9월 20일을 연합회의 날로 제정(주보성인 : 정하상 바오로)
1988. 10. 15 제10대 지도신부 류이규(프란치스코) 신부 취임
 1989. 6. 28 충청지구협의회 창설(현 대전지구형제회)
 1990. 11. 11 제16차 전국총회, 제8대 평의회원 선출(회장 : 김종학 아오스딩)
1991. 2. 12 제11대 지도신부 유영진(루가) 신부 취임
1991. 6. 15 경남지구협의회 창설(현 경남지구형제회)
 1991. 9. 15 국제평의회 회장(엠마누엘라 데 눈치오) 및 세계 지도신부(칼 쉐이퍼) 방한
 1992. 1. 24-25 전국 연례회의(새회헌 발효, 새 회헌 발효에 따른 명칭 변경)
내용 - 한국 연합회 → ‘한국 국가형제회’ /- 지구 협의회 → ‘지구형제회’/- 지도신부 → ‘영적보조자’
 
 
 
T 제2 성장기(1993-현재)

제9대 국가평의회(1993. 11. - 1996. 11.)
1993년 11월 20-21일 제17차 국가형제회 정기총회에서 제9대 국가평의회(회장 박상배)가 구성되었습니다. 1993년 6월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헤르만 샬룩이 방한하여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1994년 4월에 서울지구형제회, 6월 경기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1995년 4월 영남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으며, 그해 6-7월에 회칙을 중심으로 한 양성교재 1, 2권이 출판되었습니다.

제10대 국가평의회(1996. 11. - 1999. 11.)
1996년 11월 제18차 국가형제회 선거총회에서 김수업(토마스 아퀴나스) 형제가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97년 2월 제12대 국가영적보조자 최병철(아오스딩) 신부가 취임하였고, 1997년 5월 인천지구가 구성되었으며, 형제 회원들에게 보급할 성물을 제작하는 국가 성물팀이 구성되었습니다. 1998년 6월 제주지구가 구성되었고, 이 시기에 제주지구 사제회원 5명이 입회하였습니다. 1999년 1월 15-17일 국가연례회의 및 회칙반포 2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전국의 형제회는 안정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서울지구의 4개 형제회가 12개로 분할되었습니다.

제11대 국가평의회(1999. 11. - 2003. 1.)
1999년 11월 제19차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제11대 국가평의회(회장 김수업 유임)가 구성되었습니다. 2000년 10월에 청주지구가 구성되었습니다. 2001년 2월 국가영적보조자 김창재(다미아노) ofm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3월에는 인터넷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국가형제회 홈페이지(www.ofskorea.org)를 개설하였습니다. 새 회헌의 공포에 따라 2001년 9월 ‘발자취를 따라서’를 개정 발행했습니다. 2001년부터 양성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국가 산하 여러 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 1월 국가형제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새 회헌에 따른 국가규정을 통과시켰습니다. 2002년 6월 서울 프란치스코형제회 회원인 최요안(요한) 형제를 중국 연변에 선교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양성을 위해 각종 참고서적들이 번역되거나 발행되었습니다. 또한 국가형제회는 회칙과 회헌이 요구하는 교회와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 요구에 부응하여 국가평의회에 정평창보담당과 선교담당을 두었습니다. 또한 회헌에 따라 영적보조자 협의체가 이루어져 2003년부터 작은형제회 김창재(다미아노) 신부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김인규(토비아) 신부가 협의체로 국가형제회 영적보조자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봉사 기간은 2년으로 하여 순번제로 봉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제12대 국가평의회(2003. 1. - 2006. 1.)
2003년 1월, 제20차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제12대 국가 평의회(회장 한영숙 데레사)가 구성되었습니다. 대표 영적보조자는 김창재(다미아노) 신부였고, 2005년 1월부터 꼰벤뚜알의 김인규(토비아) 신부가 국가영적보조자 대표로 부임했습니다. 2003년 5월 처음으로 국가규정을 국제평의회로부터 인준받아 6월 29일 국가규정 인준 기념 행사를 가졌습니다. 또한 그해 10월 재단법인 ‘재속프란치스코회’를 설립 인가 받았고, 양성교재 ‘아씨시’와 ‘폰테 콜롬보’를 발간하였습니다. 2004년 1월에는 ‘평화의 사도’를 혁신하여 격월간 잡지형태로 출간하였고, 3월에는 양성교재 ‘라베르나’를 출판하였습니다. 그해 5월에는 회칙반포 25주년 행사를 전남 장성, 광주지구 회관 광장에서 전국의 회원 2,500여명이 모여 축하행사를 하였습니다. 11월에는 한국 프란치스칸 가족봉사자 협의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습니다.

제13대 국가평의회(2006. 1.- 2009. 1.)
2006년 1월,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제13대 국가 평의회(회장 조철현)가 구성되었습니다. 13대 평의회는 각 직책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형제회 운영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2007년 1월부터 2년간 유수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영적보조자 대표로 봉사했습니다. 꼰벤뚜알 영적보조자로는 김인규(토비아) 신부가 봉사했습니다. 국가형제회는 중국에 파견한 최요한 선교사에게 아낌 없는 지원을 하여 화룡 양로원을 건축하였습니다. 전국의 회원들도 최선을 다해 최요한 선교사의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제14대 국가평의회(2009. 1. - 2012. 1.)
2009년 1월, 국가 선거총회에서 제14대 국가 평의회(회장 김수업)가 구성되었습니다. 2009~2010년까지 꼰벤뚜알의 윤진영(요한) 신부가 대표 영적보조자였고, 2011년부터 작은형제회의 김태승(안티모) 신부가 대표 영적보조자로 봉사하였습니다. 또한 평의회는 2012년 한국진출 75주년을 준비하면서 75주년 기념위원회를 조직하고 역사 작업, 초기회원의 인물 평전,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학술세미나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10년 7월 31일 서울지구에서 분할한 의정부지구를 구성하였습니다. 형제회 회개와 쇄신을 위한 전국 회장단 열린토론회가 지역별로 열렸습니다. 특히 매년 전 세계에 산발적으로 재해가 발생하는 지역에 회원들의 성금을 보내고 있다. 또한 카푸친 작은형제회 설립 첫 형제회인 비오 형제회가 2011년 8월 27일 출발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 내 3회와 평신도 영성단체의 모임이 처음으로 개최되었습니다. 2011년 11월 12일 강원지구를 구성하였습니다. 12월 6일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광주지구에 사제형제회 설립을 위한 준비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관련연혁
 1993. 11. 20-21 제17차 국가형제회 정기총회, 제9대 국가형제회(회장 : 박상배)
 1994. 1. 21 제11대 국가영적보조자 유영진(루가) 신부 유임
 1994. 4. 17 서울지구형제회 구성(회장 : 나호연 시몬 선임)
1994. 6. 4 경기지구형제회 구성(회장 : 조태로 간디도 선임)
1994. 6. 25 경남지구형제회 총회(회장 : 김수업 토마스)
 1994. 12. 24-30 칼 쉐이퍼(Carl Schafer, ofm) 총영적보조자 방한
 1995. 4. 30 꼰벤뚜알 영남지구형제회 구성
 1996. 11. 16-17 제18차 국가형제회 총회(회장 : 김수업 토마스아퀴나스) 
 1997. 2. 17 제12대 국가영적보조자 최병철(아오스딩) 신부 취임
 1997. 5 국가형제회 자체 성물 제작 봉사팀 구성
 1998. 6. 21 제주지구 구성(제주 서문성당)
1999. 11. 19 국제형제회의 사목, 형제적 방문 - 엠마누엘라 데 눈치오 국제총회장, 닐스 탐슨 총영적보조자, ofm
2000. 7. 20 충청지구가 대전지구로 명칭 개명(대전 2000-11호, 2000. 4. 15)
2001. 5. 30.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 영적보조의 일치를 위한 만남(김창재ofm, 김인규ofm conv, 월배수도원)
2001. 9. 24-27 제5차 북남미 봉사자 연수회-의왕 아론의 집
2002. 6. 21. 재속프란치스코회 첫 선교사, 최요안(요한) 형제 중국 파견
2002. 8. 21-25. 대만형제회 13명 회원 방한
2002. 10. 7-30 국제영적보조자 세미나에 국가영적보조자 참석(로마 프라스카티)
2002. 11. 10 부경지구 구성(부산 대연동 성당)
2003. 5. 27. 국가규정 국제승인
2004. 1. 5. 평화의 사도 혁신호, 격월지 발행
2004. 5. 30. 회칙반포 25주년 행사/ 전남 장성, 광주지구 회관 잔디광장, 전국 회원 2,500여명 모임
2004. 10.3. 부경지구,부산지구 통합
2005. 8. 12-21 국제유프라 모임, 독일, 14명 참석,(12-15일, 제20차 세계청소년대회, 독일 (16-21일, 14명 참석)
2006. 6. 4 OFM총봉사자 호세 로드리게스 까르발요 내한. 국가, 서울지구 방문
2006. 8. 14 홍콩 YOUFRA 회원14명 한국국가형제회 방문
2007. 12. 29 서해 태안반도 기름 띠 방제 작업 참가
2008. 6. 15 미얀마 쓰나미 피해 이재민을 위한 성금, 1회 선교위원회에 전달
2009. 9. 22. 75주년 기념위원회 출범 기념미사
2010. 7. 31. 의정부지구 구성
2010. 9. 15.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군종교구장 착좌식 참석
2011. 2. 22-24. 제2회 프란치스칸 리더 모임 참석(방콕), 이후 방한 FI 소개.
2011. 4. 6. 7월. 전국회장단 열린 토론회
2011. 9. 18. 국가 임시 회의 개최(서울지구 분할 구성에 따른 지역 분할 및 회관 건립 건)
2011. 11. 17. 강원지구 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