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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정평환 지침서1부 3장

조회 수 2159 추천 수 0 2004.06.12 08:59:30
복음화와 양성에서의 정평환

1.복음화와 정평환
“복음화”란 말은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0주년을 기념을 위해 공포한 Evangelii Nuntiandi 이전까지는 자주 쓰이지 않았다. 공의회 10여년 전 서구는 탈그리스도교화를 직면하였고, 그 결과 Karl Barth와 같은 몇몇의 유럽 신학자들은 선교 신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된다는 기본적 메시지의 확신한 선포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설교는 이 기본적 복음화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개신교 사목 신학자들의 이 경험 위에 세워진 두드러진 사목 회의인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화를 강조하였다. 1차 바티칸 공의회와의 비교는 교훈을 준다. 1차 공의회는 복음(gospel)이란 단어를 단 한번 사용했었고 복음화와 관련된 단어는(evangelize, evangelization)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반해 2차 바티칸 공의회는 gospel을 157번, evangelize를 18번, evangelization을 31번 사용하였다.
바오로 6세의 의해 제창된 복음화 개념은 선교 신학자들의 개념보다 더 폭넓다. 바오로 6세는 교리학에 앞선 우선적 선언으로 복음화를 생각했다. 바오로 6세에게 있어 복음화는 은종이고 가장 심오한 교회의 정체성이었다; 교회는 복음화 하기 위해 존재한다. 복음화는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며, 은총의 경로이며 죄인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며,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영원히 존속케 하는 것이다.(EN 14)
복음화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구원”을 선포한다. 구원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로 이해된다. 특히 죄, 악으로부터의 해방되어 하느님을 아는 기쁨, 주님께 알려지는 기쁨, 주님을 보는 기쁨, 주님께 내맡겨지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EN 9) 모든 이가 구원의 이런 묘사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모든 이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구원을 보기에 열심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해는 성서와 성전과 일치한다.
그 예로, 출애굽은 순수한 영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출애굽은 두드러진 경제, 사회, 정치, 문화적 해방이었다. 구원은 오늘날 이 세상의 수 십억을 괴롭히는 비인간적인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이것을 포함한다. 이스라엘 역사 초창기에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적 계획을 설명하였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시어 상속받게 하신 땅에 틀림없이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 항상 너희 손을 뻗어 너희 형제와 도움이 필요하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라.(Dt 15:4.11)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풍요는 하느님의 아들 딸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져야 한다.
바오로는 이와 유사한 말을 고린토인들에게 했다: 부의 관해서는 당신들 사이에 어떤 평들이 있어야 한다.(2Cor 8,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와 가난한 이와의 간격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 계획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상 이 넓어진 간격은 “인간의 미래를 위협한다.”(Octogesina Adveniens, 7) 절망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하므로(그 예로, 수백만의 난민들) 오늘날 복음화는 “특별히 해방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포함해야 한다.(EN 29)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모든 형태들 안의,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Redemptoris Missio, 14) 정평환 기구에 대한 근원적인 중요성은 1771년 주교 시노들의 강력한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정의를 위해 행동하고 우리에게 복음전파의 본질적인 영역으로 나타나는 세상의 변환에 참여하라. 인류 구원을 위한 교회 임무와 모든 억압적인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에 노력하라.

정의
세상의 변환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교회 임무중 일부이다. 정의, 해방, 세상의 변환에 관심없는 너무나 세상을 떠난 영성은 완전히 부적당하고 비복음적이다. 1987년 주교 시노드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어, 오늘날의 거룩함은 정의의 헌심없이는 얻어질 수 없음을 명료하게 이해시키신다.” 우리 자신의 정의 투신 실패는 거룩함의 성장의 실패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 사회교육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본질적 부분이며 새로운 복음화의 본질적 요소이다.(Centesimus Annus, 5).
가난한 이의 우선적 선택은 모든 교회 전통이 증언하는 선택이며 교회 사회 가르침의 핵심이다.(Sollicitudo Rei Socialis, 42)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설교와 삶에서 이 선택에 매우 두드러졌다. 그의 유언에서 그는 주님께서 그를 가장 가난 한 이들인 나병환자들 가운데 인도하셨다고 설명한다. 나평환자는 그가 매우 꺼렸던 이들이었다. 프란치스코가 역겨웠던 것이 감미로운 것으로 바뀌는(아름다운 회개의 묘사) 은총을 받은 것은 그때 였다. 동시대의 교황의 가름침과 매우 유사하게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할 도움을 정의와 연관된 것으로 고려하였다: “동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주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권리입니다.(RegNB 9,8)

평화
젊은 프란치스코가 기사가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회개 이후 그는 가장 열렬히 평화를 증진시키는 자가 되었다. 그 당시는 세상 뿐 아니라 교회도 폭력을 사용하였다(예, 십자군) 초창기 프란치스칸 운동은 “평화의 사도” (1Cel 24)로 알려졌다. 폭력은 악마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했으며 전쟁으로 찢겨진 도시 Arezzo를 향해 마귀를 쫓는 기도를 했다. 왜냐하면 그는 폭력을 마귀에 사로잡힌 표지로 보았기 때문이었다.(2Cel 108)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그에게 평화의 인사를 계시하셨다고 확신했다. 그의 글에서 그가 가장 경고하는 악은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평화를 파괴시키는 것들, 즉 교만, 탐욕, 오만, 허영심, 질투, 비난, 용서하지 않음이다. 임종시 프란치스코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아씨시 주교와 시장을 화해시켰다. 그는 죽을 때까지 평화의 사도였다. 그는 평화를 만들며 죽었다. 아씨시의 영은 평화의 영이기에 요한 바오로 2세가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려 했을 때 그는 아씨시로 그들을 초대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초창기 형제들에게 권고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이 말로 평화를 전할 때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한층 더 그러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여러분들로 해서 분노하지 않고 또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을 여러분의 온화한 모습으로 평화와 자비와 화목으로 이끌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낫게 하고,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L3S 58)

환경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교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시대적 징표”를 읽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시대적 징표”는 또한 “성령의 징표”로 불린다. 왜냐하면 시대적 징표들은 세상과 교회에 성령이 현존하고 활동하시는 방식으로 향한다. 성령은 우리의 의식을 새로운 앎의 수준으로 올려준다. 환경운동은 우리시대의 징표들 중의 하나이다. 계속해서 많은 이들이 환경에 대한 염려를 미래 세대에 대한 정의와 관련하여 보고 있으며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과 같은 판단에 동의하고 있다. “환경 위기는 도덕적 문제이다”(1989년 12월 8일 메시지) Pontifical Academy of Sciences의 유명한 과학자는 “우리는 창조 의무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지배와 정복의 개념을 가지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보살핌의 개념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취급하는 그 방식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의 책임감을 살펴본다면 지금의 상황은 인간이 무자비하게 물질적 번영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인 사람에게는 이 사실은 용납할 수 없음을 알것이다. 과소비와 낭비, 특히 부유한 나라의 이런 것은, 환경파괴의 주요인이다. 신중한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우리 프란치스칸은 이 환경 위기를 해결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는 프란치스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태도가 환경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의 협력으로 환경운동이 정신을 가질 수 있기를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나벤뚜라 성인은 피조물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신비적인 시각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하느님 사랑의 모든 것들에 매료되어 그는 하느님의 손이 이루신 모든 일을 기꺼워했으며, 이 기쁨을 주는 것들의 현시 앞에서 그의 마음은 생명력을 부여하는 근원 즉 모든 것의 원인에게로 날아올랐다. 모든 아름다운 것에서 그는 아름다움 자체이신 그분을 보았으며 창조물에 새겨져 있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그는 어디서나 사랑하는 그분의 뜻을 따랐다. 그는 모든 피조물을 사다리로 삼아 온전히 바라마지 않는 그분께 오르고 그분을 껴안고자 했다.(LM 9,1) 보나벤뚜라는 간결한 문장 안에서 그 자신 뿐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시각을 나타낸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느님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Comment. in Eccles.). 분명한 이유로 요한 바오로 2세는 Inter Sanctos Praeclarosque Viros(1979년 11월 29일)의 서한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환경의 주보로 선언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종으로 이 장을 마치겠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존중하라. 이것이 현실화되도록 복음화 하라. 그러면 주님이 마음을 돌리어 정치, 경제 체제를 인간화 할 것이다.(Puebla, 1979)

2. 정의 평화 환경에 있어 프란치스칸 양성
우리 회헌은(art. 126ff)은 모든 형제들이 양성중임을 상기시킨다. 형제들 사이에 구별이 있다면, 그 구별은 양성 안의 형제들과 양성 밖의 형제들이 아니라, 초기 양성중의(청원자로 받아들여져 정식 회원이 되기전까지) 형제와 연속적 양성중의(정식 회원이 된 후부터 죽을 때까지) 형제이다. 영속적 양성은 전 삶의 여정처럼 보인다.(art 135) 우리의 영속적 양성은 회개자들로서의 계속적인 우리 삶의 회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첼라노나 보나벤뚜라가 프란치스코를 “항상 새로운” “항상 다시 시작하는” 으로 묘사하였다. 우리는 이런 프란치스코 처럼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임종이 가까왔을 때 프란치스코가 초기 형제들에게 용기를 준 것같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용기를 준다.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1Cel 103) 우리 프란치스칸 미래는 불을 다시 붙이지 않으면 천천히 사그라들듯이 비관적으로 될 수 있다. 그래서 바오로는 디모테오를 상기시켰다.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2 디모 1,6) 그 선물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철저한 복음적 삶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시각이며 이것이 간직되지 않고 양육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있다: 성장 혹은 퇴보; 진보 혹은 침체. 계속적 양성, 회개는 진보와 성장의 길이다.
영속적 양성은 일생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해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확인되었다. “모든 삶은 끊임없는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완성은 영속적 양성 없이는 획득될 수 없다. 모든 소임과 일이 지속되고 효과적으로 남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쇄신을 요구한다. 즉 영속적 양성은 개인과 사람들의 사회 문화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 뿐 아니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오늘날 절박하다. 새로운 복음화는 세기말 교회의 본질적이고 긴급한 임무이다.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복음 전파자가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복음화는 그의 본질적인 요인 안에 교회의 사회 교의를 포함해야 한다.(Centesimus Annus, 5) 우리는 익숙하지 않는 교의에 대해서는 선언할 수 없다. 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대한 연구와 숙고는 우리 영속적 양성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GG.CC. art. 96.) 교회의 사회 가르침은 공의회에서 보편 교회를 위해 선언되었다. 특히 사목 헌장과 교황의 여러 회람문에서 발표되었다. 주교회의는 보편적 사회 가르침을 자신의 나라의 조건에 적용함으로 매우 가치있는 봉사를 하고 있다. 이런 노력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남미 주교회의와 1973년 메델린에서 열린 CELAM Ⅱ 이었다.
메델린은 많은 남미 교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가난한 이의 우선적 선택”. 500년간의 낡은 방식의 남미 교회는(당시 교회가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을 설교했을지라도 교회는 소수 독재자들과 지배 계층과 결탁되어 있었다.) 메델린에 의해 죽고 더 복음적인 새로운 방식이 탄생했다. 메델린은 영속적 양성과 계속적 회개의 좋은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지역에 퍼져있으며 은총은 남미 뿐 아니라 모든 교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흥미롭게도 남미인들에 대한 메시지 안에서, 메델린은 “새로운 복음화”란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이 용어는 그 이래로 수없이 사용되었고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정평환에 관련된 영속적 양성을 위해 메델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경험의 중요성이다. 남미 주교 회의에서 주교들은 귀납적 방법을 사용했었다. 그들은 추상적인 교의를 연구 대신에 수많은 남미 가난한 자의 살아 있는 경험들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2차 바티칸 공의회 언어들을 만들었다: “우리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GS 1)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 회개했던 것이 아니라 나병 환자들 가운데로 가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체험을 통해 회개했다.(유언 2) 프란치스코에게 역겨웠던 것이 감미로운 것으로 바뀌게 한 것은 살아있는 체험이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도 유사한 체험과 유사한 회개를 하기를 원했다. “형제들은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병자와 나병환자들,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기뻐해야 합니다”(RegNB 9,2) 빈곤, 기근, 무주택, 폭력의 재앙, 환경 파괴에 대한 책이나 기사들을 읽거나 강연에 참석하는 것은 도움적이고 필요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 해박하여 능력있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가난한 자와 삶을 나누는 체험과 비인간화시키는 가난, 폭력, 환경 파괴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체험은 우리의 계속적 회개와 양성을 위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순한 선생보다 증언자를, 가르침보다 체험을, 이론보다 삶과 행동을 더 신뢰한다.(Redemptoris Missio, 42)
모든 형제들은 적어도 몇번 정평환의 문제에 헌신하는 기구 안에서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체험을 가져야 한다. 이 체험에서 한번의 만족할 결과는 우리 모든 수도원 안에서 정평환에 관계된 문제들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가하게 할 것이다. 그 문제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봉사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올릴 수 있다. 그것에 의해 또한 그들의 회개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더 효과적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젊은 수도원들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힘과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촉진시키기 위한 그들 자신의 독특하고 필요한 공헌을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사회 문화적 분석에 훈련된 젊은이들은 우리의 세상을 황폐화시키는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들을 더 잘 이해할 것이고 이런 문제들을 없애기 위해 그들의 힘을 더 잘 사용할 것이다. 충돌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교육은 모든 이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유익하다. 젊은이들은 종종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쉽게 폭력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요약에서 우리는 세 단계를 제안한다.

3. 요약

기도
비록 정평환 문제들은 종종 세속적인 관심으로(많은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은 관심을 가진다.) 고려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믿음의 사람으로 접근한다. 이런 문제들을 다룰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서 원문을 숙고하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발전시키고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령께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항상 성령은 전복음화 사업의 주요 동인이시기 때문이다. 전례 헌장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룩한 말씀의 전례를 권장했다. 우리 회헌도 형제회 안에서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말씀의 전례를 권하고 있다. 정평환에 관계된 말씀의 전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 성구집(Lectionary)의 성서 본문을 사용함으로 쉽게 준비할 수 있다. 성서 본문과 함께 많은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는 프란치스칸 초기 문헌들, 현대 자료들을 사용할 수 있다. 환경에 관해 봉헌된 미사 성구집은 없지만, 많은 성서 봉문들은 환경에 대해 다루고 있다.(예, 창세기 1; 2,4-7, 15; 9,8-17; 레위기 25,23-24; 사무엘 8, 65, 104, 147, 148; 요한 1,1-5; 로마 8,18-25; 골로사 1,15-23, 요한 묵시록 21,1-5. 프란치스칸 자료들 중에서는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는 주목할 만하다.

연구와 숙고
Tertion Millenio Adveniente 칙서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은 도전적 질문을 하였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사회 교의의 원리들에 대해 진실로 알고 실행하고 있는가?” 이 말은 우리들 특히 설교하고 가르치는 형제들에게 일련의 자신의 의식을 점검하게 한다. 우리는 정평환의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 전통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정말 가톨릭적인가? 우리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수도원에서 이 의무적인 질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중요성을 부과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사목하는 사람들이 가톨릭 사회 전통에 대해 많이 무지하다면 그것은 많은 점에서 우리들의 잘못이다. 새 천년대에서 새로운 복음화는(요한 바오로 2세는 절박하고 반복적으로 이것을 요청하였다.) 그의 본질적인 요소 안에 교회의 사회 교의 선언을 포함해야 한다. 이 교의는 보편적 확실성의 원리들과 함께 각각의 대륙, 나라, 지역의 구체적 상황 안에서 살찌워질 필요가 있다. 교회의 이 구체적 적용 역시 능력, 연구의 결과, 숙고 그리고 사회, 문화적 분석을 요구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평신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평환 문제들의 실제적 해결은 거의 독보적으로 평신도의 능력과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봉사하는 평신도 안에서 그리스도교 사회 양심을 양성하고 있는가? 거룩함에 이르는 평신도의 길은 은둔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삶을 통해서이다. 즉, 그들 자신을 현세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데 바침으로 하느님 계획에 부합시키는 것이다. 요한 23세에 의해 언급되었듯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충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즉, 개인의 완성과 세상에서 각 개인의 활동 사이의 상충성. 각 개인은 현세적 염려들을 제쳐놓음으로 완성에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반대로 각 개인은 자신의 일상의 일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은 섭리에 완전히 일치한다. 실제적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세속적 질서 안에 있을 것이다.(MM 2249f) 그래서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에 있어서 평신도의 상태는 역시 세상의 완성의 상태이다. 평신도들은 우리로부터 그와같은 메시지를 듣는가?

활동
나는 몇가지 제안을 이미 했다. 즉 연구와 우리 수도원에서 정평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른 활동들은 대부분 지역의 상태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그래서 관구 회의나 총회들 뿐 아니라 수도원 회의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총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계속적 양성은 개인적, 공동체적이고(GG.CC.135)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형제체적으로 복음의 빛 안에서 현시대의 긴급한 필요들에 응답하도록 부름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동, 연구, 숙고 없이는 열매 맺을 수 없다고 간결히 말한다.

결론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제창된 2000년 대희년을 우리가 준비하면서, 우리 작은 형제들은 현시대 대부분의 긴급한 사회적 도전 앞에서 프란치스코의 모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는 것을 깊이 상기한다. 프란치스코는 진실로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 였으며(1Cel 76), 그의 초기 형제들은 “평화의 사도(1Cel 24) 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모든 피조물의 형제로 여겼다. 프란치스코와 교회의 사랑스러운 아들인 우리는 교황의 긴급한 바램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예수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상기한다면(마르 11,5; 루가 7,22) 우리는 어떻게 가난한 이와 소외받은 이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을 강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많은 분란과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우리 시대에서 정평환에 헌신한다는 것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고 기념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기에 레위에 나타난(24,8-12)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음성을 올려야 할 것이다.(TMA,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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