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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생태위기시대의 교회의 역할

조회 수 2269 추천 수 0 2004.06.12 09:26:11
생태 위기 시대의 교회 역할과
환경신학의 흐름
?생태계의 생명 부양 능력과 환경 신학?에 대한 논평


한 면희 교수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철학

1. 환경 재난과 인간의 노력

재난으로 일컬을 정도의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그 당시에는 산업 선진국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하였다. 그런데 국지적 재난이 공해성 산업설비로 인한 것임이 밝혀지자, 20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선진국의 공해 산업이 개발도상국가와 후진국으로 수출되었다. 그래서 제3세계에서도 같은 유형의 재난이 나타났다. 바로 이 시기에 환경문제는 전지구적 차원으로 증폭되고, 국지적 재난의 발생은 지구촌 생태계와 생명체의 위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산업문명이 과도하게 자연에 부담을 주고 있던 시기에 환경문제 전문가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울렸고, 이어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가 조금씩 취해지기 시작했다.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DDT의 남용이 생태계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했고, 1968년 폴 에를리히는 ?인구폭탄?(The Population Bomb)에서 맬더스의 이론을 원용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폭발로 인해 대기근이 닥칠 수 있음을 경고했으며, 1972년 로마클럽은 현재와 같은 산업화 추세는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는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란 보고서를 내놓아서 전 세계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3년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목적은 풍부하지만 방법은 간단한 것을 권유하였고, 1976년 베리 코모너는 ?권력의 빈곤?(The Poverty of Power)에서 미국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논의했고, 1980년 제레미 레프킨은 ?엔트로피?(Entrophy: A New World View)에서 가용 가능한 에너지가 쓸모없는 에너지로 바뀌는 과다한 자원 사용에 대해 깊이 우려했으며, 그리고 1992년 월드워치 연구소 소장인 레스터 브라운은 ?세계의 현황?(State of The World 1992)이란 보고서에서 환경 혁명을 이룩하자고 주장했다.

또 한편으로 1892년 창립된 시에라 클럽을 비롯한 많은 환경 NGO가 꾸준히 지구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이후 합법적 활동만으로 지구환경보전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래서 첫 번째 지구의 날 행사가 있었던 다음 해인 1971년 그린피스가 출범하여 생태주의 이념을 토대로 하되, 비폭력을 견지하는 선상에서 시민불복종 등의 적극적 행위와 여론매체 호소에 주력하는 비합법 운동으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어 가장 효과적인 보전운동을 펼치고 있다.

환경론자의 적극적 주장과 운동 단체의 자연보전 노력에 힘입어, 1972년 처음으로 스톡홀름에서 유엔 환경회의가 열렸고, 브룬트란트가 의장으로 있던 유엔 환경개발위원회는 1987년 ?우리 공동체의 미래?(Our Common Future)란 보고서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창안하여 제출하였고, 1992년 리우 유엔 환경회의는 이 개념을 채택하였다. 특히 리우에서는 의제 21이 채택되었고 생물종다양성협약과 기후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노력이 20세기 중후반 이후 전개되었지만, 21세기에 환경재난이 감소하리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의 산업문명 틀이란 구조 속에서는 사태를 누그러뜨리거나 다소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근본적 해법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적 인식에 비추어 보면, 자연과 인간의 문명이 공존하는 새로운 문명이 출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지구촌 인간 모두의 의식 전환과 그에 따른 정책과 법의 전환, 그리고 제도와 체제의 대폭적 변화까지 동반되어야 한다. 여기서 종교가 감당해야 할, 특히 환경 재난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그리스도교가 해야 할 일정한 몫과 역할이 있음은 분명하다.

2. 그리스도교의 견해와 역할

전헌호 신부는 ?생태계의 생명부양 능력과 환경신학?이란 글에서 오늘날 환경문제에 직면한 그리스도교의 자연에 대한 견해를 들추어내어 밝히면서, 또한 향후 해야 할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노아 홍수 심판은 인간의 잘못에 대해 야훼가 자연 재앙을 통해 ㅂ러하시는 것으로 제시하고, 출애굽기에서 모세오경의 저자가 자연의 창조력을 훼손시킬 경우 다음 세대가 고통을 당하게 됨을 알고 있었다고 밝힌다. 신약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에 대해 존중과 관조의 자세를 유지한 것으로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은 스스로 노동하는 수도자를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간이 자연과 한 가족임을 실천한 것으로 보여준다. 근대의 게하르트는 자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읽었으며, 현대의 로마노 과르디니는 기술 문명의 극복을 쉬해 새로운 삶에 대한 영성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으로 언급한다.

전헌호 신부께서 제시한 성서 출처와 실천저 수도자의 생애는 향후 환경신학의 내용과 방향의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절한 제시라고 여겨진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첫째, 이런 흐름의 글만 떼어놓고 보면 그리스도교가 환경문제를 억제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던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1967년에 발표된 린 화이트 2세의 논문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는 오늘날 환경 위기의 근원적 뿌리로 유대교-그리스도교 전통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화이트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글을 상당한 정도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산업문명과 과학기술이 자연을 오직 자원으로만 간주하여 마음껏 이용해도 좋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적극적 빌미를 제공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부분적 책임을 고백한 후, 자연 친화적인 성서해석과 역살 설정을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전 신부께서 밝힌 그리스도교의 역할로는 삶 속에서, 특히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의식 개혁이 요구되고, 교회 전통 속의 청빈한 성인의 삶을 본으로 삼도록 하며, 소비주의 문화를 지양하되, 환경 교육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바른 인식의 수순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처방의 수위가 너무 낮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다. 즉 중병에 대핸 가벼운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처방이 가벼우면 교회의 역할도 가볍고 수동적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 체제에 적극 반영한 제도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대변하듯이, 사회 구성원 각자는 오직 자신만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애쓰면 보이지 않는 시장이 자동적으로 조절해서 모두를 번영으로 인도한다고 함으로써, 출발선상의 이기주의를 마지막에는 공공선으로 치장한다. 자본가를 비롯한 경제 주체는 공동체 다른 구성원을 고려할 이유가 없다. 이 상황에서 처음에는 기술 혁신을 통한 경쟁력있는 제품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질적으로 비슷해지게 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취하는 공동의 조치는 이익을 위해 소비의 강도와 순환을 빠르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제품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폐기토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비의 촉진은 자원 고갈과 공해 및 오염 문제를 불러일으켜 자연에 부담을 주고, 더 나아가 자연과 동식물, 인간을 병들게 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산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사회주의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산업주의에 도태를 두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를 방치한 채 성인의 청빈한 삶을 본받도록 소비를 줄이자는 요구는 필요하지만 너무 약한 처방이라고 보인다. 물론 전 신부께서 결론에서 새로운 의식 체계와 환경신학의 필요성을 주문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거의 같은 취지였다고 여겨지는데, 정말로 지금은 물질 숭배의 산업 문명을 새 문명으로 대체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3. 환경 신학의 흐름과 현황

전헌호 신부는 본문에서 호나경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신구약과 교회 내 환경 선각자의 말씀과 자세가 언급되어 있다. 소중한 불씨라고 여겨진다. 다만 그런 씨앗을 토대로 이미 전개된 환경 신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니 않고 있다는 덤 또한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 그런 씨앗에서 발아된 환경신학의 현황과 흐름만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보완하겠다.

화이트는 환경위기의 뿌리로 유대교-그리스도교를 지목하였지만 비판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학자의 주보 성인’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일종의 영성 평등주의(spiritual egalitarianism)의 주창자로서 영적 예배의 공동체 속에 인간만이 아니라 고등동물과 새, 개미, 벌레를 포함시켰으며 더 나아가 바위와 물, 불, 바람과 같은 무생명체도 포함시키고자 했다. 화이트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적극 알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배척한 다른 종교의 범신론적 요소와 정령신앙을 다시 복원시키고자 했다.

화이트의 비판 이후, 많은 교계 신학자들은 이에 경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런 대응 가운데 유력한 하나가 청지기 직무론(theory of stewardship)이다. 청지기 직무론자는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란 창세기 2장 15절의 말씀에 주목하여, 인간에게 땅을 경작하면서 생활을 유지하되, 피조 세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 직무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 르네 뒤보는 6세기에 활약한 성 베네딕도에 초점을 맞추어, 청지기 직무의 모형을 수도사의 땅에 대한 윤리적 행위에서 발결했다. 그는 베네딕토 성인을 프란치스코 성인보다 훨씬 진실한 인간의 표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화이트에게 응수하였다. 1980년대의 그랜버그-마이클슨도 같은 선상에서 인간의 필요와 목적에 부응하도록 자연을 조종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여기는 것은 신의 역할을 사칭한 것으로서, 신에 대한 일종의 모반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밝힌다. 더글러스 존 홀도 교회 전통 안에서 위기 극복의 상징(symbol)을 찾는데, 그것이 곧 청지기 개념이다. 그는 비록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청지기 개념에 호소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 보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청지기 직무에 의거한 환경신학이 다소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일부 신학자는 보다 근본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교 이외의 대다수 종교와 서양의 비주류 철학이 제시한 범신론(pantheism)에 주목한다. 범신론은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연신학의 입장에서는 지구를 구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범신론 그 자체로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기에 그 접점으로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 제시되었다.

만유재신론은 세상을 신과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만유재신론은 투박한 범신론에 비해 강점을 갖는다. 그것에 의하면, 신은 자신이 만든 세계보다 더 크다는 성서 주장에 합치하면서 신이 세상에 내재한다는 원리를 구비함으로써, 범신론이 갖는 지구보전의 효과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대표자 가운데 하나인 매튜 폭스는 개인 구원을 부추기는 교회 경향을 비판하면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라 지칭한 것, 즉 전체 우주에 성례와 결속, 그리고 경이로움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는 그리스도관을 핵심으로 삼는 신학적 패러다임 전환을 도모한다. 그는 만유재신론을 반영하는 신비스런 영성(spirituality)을 통해 생태적으로 감응하고 자연에 책임을 지는 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신학자 살리에 맥퍼그는 개인 구원을 멀리 떨어진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지구를 떠나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무책임하다고 비판하면서, 지구를 신의 몸(God's Body)으로 간주한다. 신의 신체인 지구는 모든 존재를 출현시키 sdnjscjs이고, 자궁이며, 모든 생명체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터전이다. 따라서 맥퍼그 신학에서 신은 오히려 어머니로 간주된다. 샤르댕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베리는 과학에 근거하고 있으면서 인류가 운명적으로 더 넓은 지구 공동체와 조화를 이룬다는 조망을 형성할 수 있는 우주적인 인간 이야기를 펼친다.

환경신학의 스펙트럼은 다양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청지기론과 급진적인 만유재신론 사이에 해당하는 견해가 다양하게 개진되고 있다. 요셉 시틀러는 어머니 지구 개념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창조적 힘을 지닌 존재로서 자연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이트보다 10년 앞서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좇아 자연을 인간의 자매로 간주함으로써, “하느님-인간-자연”을 하나의 통일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베어 2세는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창세기 1장 31절을 인용하면서, 자연은 인간 목적 달성과 무관하게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구란 인류에게 전셋집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과정신학자 존 캅 2세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기초로 우주를 과정(process) 속의 사건이 펼쳐지는 장으로 이해한다. 고전적 유신론이 하느님을 불변적 존재로 묘사하는 데 반해, 과정신학자는 하느님의 현존이 피조물에 개방적이어서 피조물의 환희와 고통에 반응하는 완전한 생태학적 모형으로 여긴다. 끝으로 몰트만은 흙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빚은 이간을 신토불이 형상과 신의 형상 모두를 가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자연화를 주장한다. 특히 성령이 인간뿐 아니라 자연에도 깃들어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피조물의 왕관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sabbath)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매우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환경신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그 색깔의 차이가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흐름은 긴박한 생명 위기의 시대에 행해지는 신학의 녹색화 작업의 일환이다.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토대로 의식 구조의 변화가 도모되고, 그에 따라 인간의 현실 제도가 바뀔 때, 비로소 인간의 문명이 자연과 공존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목적이 실현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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