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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정평환지침서2부3장

조회 수 2092 추천 수 0 2004.06.12 09:12:22
정평환 지침서 2부 3장


창조질서 보전/환경 정의



작은 형제회의 회헌 71항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위협받고 있는 자연에 대해 존경스런 태도를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을 완전히 형제적인 것이 되게 하고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생애로부터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깊은 사랑은 ‘피조물의 노래’에 아주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는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하였고, 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모든 사물이 그에게는 선이었다”라고 첼라노는 전하고 있다(2첼라노 165).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모든 피조물을 사다리로 삼아 온전히 바라 마지 않을 그분께 오르고 그 분을 껴안고자 했다”(대전기 9,1).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나무를 완전히 자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는 밭일을 하는 형제에게 밭 둘레를 일구지 말고 풀을 그냥 남겨두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꿀벌들이 겨울 한기에 얼어 굶어죽지 않도록 꿀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내주라고 했고, 동물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선의 근원이신 그분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겠지만, 벌써 이 성인을 통하여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밝혀 주셨다”(2첼라노 165; 이탤릭체는 1고린 12,6에서 인용한 것임). 매는 성인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알려주었고(2첼라노 167), 꿩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키워졌고(2첼라노 170), 매미는 자신의 창조주께 찬미가를 불러 드렸다(2첼라노 171). 성탄절에는 소와 당나귀에게 평상시보다 더 많은 여물을 주게 하였고, 밀과 곡식을 길에 뿌려 새들이 특히 종달새가 실컷 먹도록 하였다(2첼라노 200). 프란치스코의 동료들은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조물 안에서 내적이고 외적인 기쁨의 위대한 원인을 찾는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기쁘게 피조물들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관상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에 그의 영은 땅 위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뻬루지아 51).

생태 정의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생태학적 반영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환경은 그 다양한 관계성, 자연 환경과 인간 문화와 사회를 모두 포괄하는 관계성 안에서 파악된다. 그 종합적 전망 안에서 사회 생태학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자연적이건 사회적이건 모든 존재들의 가능한 상호관계를 집중 조명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온 생태계의 역동적인 균형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기본 요소들을 제공한다. 생태학적 정의의 문제에 관한 답을 찾을 때 우리는 반드시 전체 생태계의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인간의 권리 존중 안에 지구의 권리가 포함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꿔 말하면, 사회 정의는 어떻게 생태학적 정의와 연관되는가? 그리고 프란치스칸 전망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우리의 사명은 어떤 방식으로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사명을 그 안에 담고 있는가?

A. 프란치스칸 생태정의의 몇 가지 원리들
생명에 대한 프란치스칸의 시각은 신 중심적이고 동시에 지구적이다. 생물 또는 무생물은 각각 주체성의 부분이며(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내재적 가치,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와의 영원한 관계성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 안에 있다.

1. 세계라는 성사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창조이래 인간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예리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와 모든 사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그들 안에서 그리고 우주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아무것도 자신들에게 돌리지 말고, 아무것도 자신들의 위하여 남겨두지 말라고 권고했다. “우리는 모든 좋은 것을 지존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모든 좋은 것이 그분의 것임을 깨달으며, 모든 선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인준받지 않은 회칙 17,17-18;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돌려 보낸다. 우주는 그 단일성 뿐만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하느님의 성사이며, 창조주께로 우리를 이끄는 “사다리”이다(참조 2첼라노165, 대전기 9,1). 보나벤투라는 “온 세상은 그림자이고, 길이고, 자취이며, 외부에서 쓰여진 책이다”라고 쓴다(Hexaem, 12, n.14). 보나벤투라에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동시에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길, 그리고 황홀한 관상의 길 끝에 계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찾는 이에게 가까운 그 길에도 계시고, 각 피조물들의 깊은 곳 안에 특히, 우리의 깊은 곳 안에도 계신다. 모든 사물 안에, 그리고 모든 사건 안에 하느님은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친근하게 현존하신다”(보나벤투라, 그리스도의 지혜에 관하여, q.2, ad.11). 지구는 거룩하다.

프란치스코가 존재들과 사물들에게 전한 특별한 사랑은 이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것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형제적이고 공손한 친교에로 들어갔다. 이 최상의 그리스도교적인 영에게 하느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찬미와 감사의 찬가에서 종종 표현되는 경이로움이 표현된다. 이 경이로움은 삼위일체적 사랑의 풍부함 안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는 창조의 다양성과 무상성(無償性) 앞에서 표현되는 경이로움이다.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의 근원이신 그분께서 모든 사물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겠지만, 벌써 성인을 통하여 모든 사물 안에서 모든 일을 밝혀 주셨다.” 이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은 그 모든 다양한 형태들 안에서 순수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 개념과 반대된다.

2. 우주는 전체다.
프란치스코는 생명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가졌다. 조화 속에서 조화를 위하여 창조된 우주는 거대한 가족과 같아서, 그 구성요소들이 그들의 다양성 안에서 상호의존하면서 단일한 우주적 형제체를 형성한다. 단일한 세계라는 개념은 창조에 대한 성서의 시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한편으로, 구세사는 인간의 역사를 포함하며, 뿐만 아니라 거룩한 약속에 개방하는 가운데 전 우주를 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들 자신은 땅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아담’(Adamah)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근원이 땅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를 통하여 인간들은 모든 피조물들이 따라야할 생명의 영원한 법을 따라서, 인간이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어머니인 대지에로 되돌아간다. 인간이란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에서도 자연과 친교를 이룬다(참조 창세 1-3; 태양의 노래).

이 개념은 자연을 손상하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여타의 철학적 형이상학과 종교적 근본주의들과 반대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윤리학과 정의를 자연으로, 그리고 지상의 모든 민족들에로 확대해야 한다.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면서 자신들의 서식지마저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창조의 선익은 인간 단독의 경제적 관심으로 감소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존재들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조화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형용사 ‘좋은’은 여기서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포하는, 즉 존재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생기적(生氣的)으로, 심미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위한 배타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타자에 대한 존중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은 그 본래적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개별성’은 존중도어야 하고 사랑 받아야 한다. 돌, 식물, 하늘의 새들, 땅 위의 벌레들, 길가의 나병환자들이나 거지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완전히 속한 것은 없다. 그들은 ‘다르고’, ‘타자’이며, 거리를 두고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다. 보나벤투라와 둔스 스코투스는 그들의 개체성 이론에서 각개 사물들의 유일성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사부의 모범을 따르면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그 풍부하고 내적인 주체성 안에서, 그 개체화 원리(haecceitas) 안에서, 존재를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인 것으로 만드는 것 안에서, 각개 사물들을 이해했다. 각개 사물 안에 기록된 이 유일성의 궁극적 이유는 둔스 스코투스가 말하듯이 “하느님의 바로 그 의지 안에” 자리잡아야 한다. 피조물들의 타자성은 우리를 무한한 타자이신 하느님에게 돌아가게 한다.

프란치스칸적인 생태학적 영성은 우리를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도전 앞에서 모든 존재들의 우주적이고 보편적 공동체로 들어가게 한다. 우주와의 이 복잡한 관계 맺으면서, 우리 삶은 우리 자신과 타자들을 향해 우리의 책임의 의미를 확대한다. 이는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존재들, 자연 세계의 것들을 포함하고 동시에 그들 각자의 신비로운 유일성과 다양성에 직면했을 때 경이로움에 대한 관상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포괄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소유하지 않는 포괄성, 연대성은 타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내포한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생명에 대한 종합적 시각에 집중하고, 대지의 존엄성과 각 사물의 본래적 가치에 집중하기에, 자연 세계와 인간을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착취가능한 자본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육화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사회적 영향이 제거된 무책임한 성찬중심주의와 지구와 지구의 생명 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무제한적 진보의 관념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B. 실천적 수준에서의 생태학적 정의

다음 세 가지 원칙으로부터 거칠게나마 세 가지 실천적 선택을 도출해 본다.

1. 생명과 상호의존적인 생명의 선택
a) “저를 지어내신 주님 당신은 복되시나이다”(토마스 첼라노, 성녀 클라라의 생애, 46). 죽기 전에 클라라는 자신의 하느님께 삶의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해 계속해서 감사를 드렸다.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는 또한 온 우주를 생명에로 불러주심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협주곡이다. “내 주여, 모든 피조물 안에서 찬미 받으소서.”

모든 존재들은 생명에 대한 권리가 있다. 야생 멧비둘기, 보잘것없는 작은 꽃, 불쌍하고 고통받는 여인, 늙고 눈 먼 남자 등등 모두는 존재에로 불림 받았고, 사랑의 같은 탐험에 참여한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중에서도 제일 작고 제일 누추한 것을 더 사랑했다. “발에 밟힐까 염려스러워 그는 길에 있는 작은 벌레를 옮겨 놓아 주었다”(2첼라노 165). 그 길 위에는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들에 의한 생명파괴가 없었다.

지구뿐만 아니라 그 위에 사는 인간과 동물은 재생의 권리를 가진다. 생명을 쇄신하는데 필요한 휴식의 시간인 안식일 법에 예속되어 있다(참조 레위 25,1-7; 19,9-10). 하느님의 창조는 인간이 탄생한 여섯 번째 날에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쉬시면서 바라보신 일곱 번째 날, 안식일을 통해서 영광의 관을 받았다(창세 1-2). 모든 사물들의 원리이자 최종점은 바로 창조주이다. 모든 프란치스칸은 생명의 예언자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음의 문화를 고발하고, (모든 생명의) 생명의 질(質)을 보호하는 길을 찾고,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희망이 되살아나는 표지가 된다.

b) 그들은 존재들의 상호의존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존재도 자기 혼자서만 또는 자기 스스로 살 수 없다. 인간의 생존은 특히 가난한 이들의 생존은 지구와 우주의 모든 생명들의 질에 달려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프란치스코는 인간들이 먹고 사는 것들을 통해서 대지의 선물을 이해했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줍니다”(태양의 노래).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대지를 보살피고 열매와 꽃들 그리고 풀들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 공업화된 세계의 수요를 해결하기 위한 단일 품종 재배는 무제한적으로 지구를 착취하면서, 결국에는 지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원천을 조직적으로 앗아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마저도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 브라질에서는 수백만의 토지없는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고, 수백만 헥타르의 삼림이 파괴되고 있으며, 이 행성의 다른 곳에서도 이 일방적인 경제정책의 참담한 결과들이 일어나고 있다.

2) 소유없는 생활의 선택(인준받지 않은 회칙 1,1)
프란치스코는 그의 형제들에게 간결한 방식으로 자기를 내어 주는 정신 속에서 단순하고 가난한 삶을 살도록 권고했다.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9). 그리고 일상에서는 모든 여분의 것들을 포기하도록 했으며, 꾸밈없는 필요성에 행복해 하도록 했다. “형제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던지,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주님이 형제들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모든 형제들은 필요한 것을 쓸 수 있습니다”(인준받지 않은 회칙 9,13.15).

이 프란치스칸 가난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이고 예언자적 차원을 떠오르게 한다.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난한 삶을 선택하면서, 프란치스코는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거부했다. 가난 속에서 살겠다는 그의 선택은 실천적 단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한편으로는 토지의 소유와 농민 착취에 집중되어 있는 봉건적 사고와,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사회 계급에 의해 도입된 소비사회라는 대조 속에 있다.

시에나의 어느 날로 돌아가 보자. 프란치스코는 어떤 가난한 사람을 만났다. 당시 프란치스코는 그의 병 때문에 작은 망토와 수도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궁핍함을 보고 망설일 수 없었다. 그는 동료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망토를 저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대전기 9,5). 소유없는 생활의 선택은 반드시 자선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없이 가난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 무엇을 가지고 사용한다는 것은 형제적 사랑의 장애물이다. 우리 안에서도 타자를 차지하려는 의지가 일어난다. 소유하려는 욕망에 끌려 타자를 존중하지 않은 어느 수련자의 이야기는 가난과 형제성의 본래적 연관의 본보기이다(참조: 페루지아 전기 70, 72-73). 지구를 차지하려는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 특히 가난하고 도움받을 곳이 없는 이들을 차지하여 지배하게 만든다. 몇몇 사람들에 의한 부의 축적은 타자를 곤궁하게 만들과 급기야 파괴하기까지 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형제들에게 이 위험을 이겨내도록 경고한다. “형제들은 은둔소나 다른 곳 어디에 있든지 간에, 어떤 장소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고, 또 누구와 싸워서 그것을 지키려 하지도 말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인준받지 않은 회칙 7,13).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제 생산 체계 내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지구에 대한 착취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자본제적 농업에서 모든 발전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술에서뿐만 아니라 토지를 착취하는 기술에 있어서의 발전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노동자와 토지를 파괴시킴으로써 사회적 생산 과정의 기술과 결합관계만을 발전시킬 뿐이다”(마르크스, 자본론 1,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p.529-530]). 생태학적 정의와 사회정의는 떨어질 수 없다.

3) 평화의 장인(匠人) 되기

모든 존재들의 생명과 타자성을 존중하는 것은 또한 평화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로운 것, 말하자면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폭력과 불의가 넘치는 사회의 한 가운데서 평화를 건설하는 평화를 말한다. 힘과 권력의 상징인 아시시의 성벽을 떠나면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이기심과 불신의 사악한 순환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둬버리는 고리를 깨뜨리려 했다. 그들은 가장 보잘것없고 비천한 사람들, 나병환자들, 길가의 거지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세상과 함께, 그리고 온 우주와 함께 평화를 만들려고 했다. 형제들의 수도원은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각각 자신의 거처로 삼는 온 우주이다(참조: 거룩한 교제63). 형제들은 모든 존재들의 존엄성과 형제성으로부터 떨어져 방어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높은 담이 없다. “찾아오는 사람, 벗이나 원수, 도둑이나 강도 등 모두를 친절하게 영접할 것입니다”(인준받지 않은 회칙 7,13).

프란치스코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인간과 지구의 우주적 화해, 그리고 이들과 이들의 창조주 사이의 화해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의 노래에서 사람들 사이의 용서에 관한 구절을 덧붙인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죽음의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여전히 가능하다. 모든 이성적인 방법으로도 평화를 이룩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은 오직 용서뿐이다. 바로 용서만이 맑고 깨끗함을 사랑하도록 하고 사람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무기로는 평화를 다시 건설할 수 없으며, 인간의 죽음뿐만 아니라 생물 종의 환경 파괴를 야기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형제들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비폭력적인 증거와 우주적인 화해에의 헌신을 통하여 창조질서 보전에 가해지는 모든 공격을 고발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닌다.

Ambrose Van Si, OFM

형제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례들

창조질서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항상 프란치스칸 영성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의 환경 정의에 관련된 중요 주제들은 동식물을 보호하는 낭만주의적 개념을 멀리하고 인간 권리와 사회 정의의 촉진을 위한 급박한 관심으로 옮겨졌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땅에 정착하고 경작하는 권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생명유지의 단계라고 보는 것이 증가했다. 대륙을 가로질러 형제들은 원주민들의 자급자족을 촉진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창조적 방법들을 개발하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는 형제들을 찾기가 드물다. 한가지 예외가 생태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속가능한 개발의 방법을 촉진하기 위해 아마존 유역의 Belem시에서 일하고 있는 바로 Jim Lockmann(미국)이다. 그의 전공은 지역 나무 종에 관한 생물학적 연구로서 대체로 환경의 장기 보전에 이용할 수 있는 나무들에 관해 좀 더 배우려는 노력이다. 브라질 북동지역은 매우 가난하며, 군대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철거민 가족들이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새 거주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새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정부로부터 어떤 재정적 교육적 지원도 받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는 보통 5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Lockmann은 그들이 환경에 대해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도록 도우면서 작업자의 공동체에 함께 살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삶은 굉장히 고달프다. 그리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자녀들의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고 Lockmann은 말한다.

Lockmann은 전통을 찾아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이 일은 18세기 형제이자 지금은 ‘브라질 식물학의 아버지’로 폭넓게 추앙받는 Josi Mriano da Conceicao Veloso 형제가 시작한 일이다. 그는 1741년 Vila Sao Jose에서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고, 1761년 4월 11일에 수도회에 들어왔다.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과 밀접하게 일하면서, 그는 2000 종이 넘는 식물의 도감을 만들고 연구하는데 거의 10년을 보냈다. 그의 연구는 또한 농사와 농업경제, 삼림보호, 동물학, 광물학, 그리고 지방언어에 집중되었다. 그의 유산은 그 이래로 그 지방에서 환경정의를 위해 일해온 수많은 브라질 형제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오늘날, Rodrigo de Castro Amedee Peret 형제는 가난한 농부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지역 식물과 곡물들을 보호하도록 도와 주면서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 일을 계속 해 가고 있다. 브라질 Minas Gerais에서 그는 아주 특별한 사업을 선구적으로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씨앗 은행을 세운 것이다. 자원자들이 다양한 지역의 나무들과 식물들에서 씨앗을 모으고 경작하고 분배하여, 외국산 교접 씨앗의 의존도를 떨어뜨리고, 수출을 위한 커피, 밀, 콩과 다른 상품작물을 생산하는 광활한 단일 재배 경작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농-생태학적 배양장에서 하는 이 일을 통해서 Rodrigo 형제와 그의 동료들은 소농들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환경의 장기적 안정성을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 배양장의 최우선 과제는 토지와 수자원의 관리와 토양침식의 반전을 연구하는 것이다. 자원자들은 한 때 여러 종류의 질병 치료에 효과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는 지역 나무와 열매, 그리고 자연 약초들을 지역 생태계에 재도입하기 위해서 약학적 가치를 조심스럽게 분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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