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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정평환지침서1부5장

조회 수 2106 추천 수 0 2004.06.12 09:08:47
프란치스칸 양성 지침서에 있는 정의와 평화


도입

지침서의 기원, 목적, 구조

양성 지침서는 1991년에 인준되었으며 전 형제회의 초기 및 영속적 양성 지침서이다. 이 지침서는, 회원들을 고유 영성의 뿌리와 시대 징표에 충실하도록 양성하는 것이 형제회와 관구들에 가장 큰 도전 이라는 확신에 대한 응답이다. 관구들와 모든 형제들이 이 도전에 응답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문헌은 1967년 총회 때부터 시작된 양성 분야 쇄신에 대한 반성 결과들을 수집하고 그 결과들을 양성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그 반성은 1971년 메델린, 1973년 마드리드에서의 총회들 그리고 1981년 총참사회이 모든 회의들에서 양성은 핵심 주제였다에서도 구체화되었으나 특별히 1987년 회헌에서 구체화되었다.
1988년의 수련장 회의와 유기서약기 책임자 회의에서는, 전 형제회에 어느 정도의 합의된 원칙들과 공통 지침들을 제공할 양성 수단의 필요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 모든 일들의 결실이 양성 지침서(Ratio Formationis)인데, 이 문헌은 법규적이기보다는 방향 제시적이고 영감적이다.


문헌은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작은 형제들의 복음적 성소: 회헌 1조로써 시작되며 회헌의 처음 5장에서 전개된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핵심적 특성을 수집한다.

프란치스칸적 양성: 양성에 관한 회헌 6장을 발전시킨다. 구조도 회헌 6장의 주제들을 따른다.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의 일반적, 신학적, 전문적, 봉사적 양성: 양성의 다른 측면들 에 관한 회헌 6장 6번을 발전시킨다.

지침서는 회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80개부록은 제외의 직접 회헌 인용이 지침서에 담겨 있다. 정의와 평화에 관해서도 회헌의 영향이 가시적이다. 그리고 양성에 관해서는 메델린 문헌도 많이 암시하고 있다부록은 제외해도 9번이 언급되고 있음.



문헌에 있는 정의와 평화

정의와 평화 문제는, 연구 대상이 될 만큼 지침서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문헌을 정평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정의와 평화의 기본 핵심 요소들뿐만 아니라 양성의 모든 중요 측면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평화에 관한 모든 근본 요소들이 명시적으로 나타나며, 종종 명시적 초점으로 또한 항상 실제적 배경으로서.
몇몇 한계들이 관찰된다:

불의의 구조적 성격과 이것이 양성에 미치는 결과(이 점에 대해서 한 번의 암시가 있을 뿐이다)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다.
정의와 평화의 문화적 차원이 그것의 정치 사회적 기원보다 더 현저한 것 같다.


여성 소외의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들: 양성의 여러 단계들에서 정의와 평의라는 주제를 발전시켜나가도록 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구별되는 교육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다.
복잡다양한 전 형제회에 일반적 지침을 제공하려 하는 이런 문헌에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이런 성격의 문헌의 역할은 구체적 교육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적 원칙들과 잡힐 수 있는 지평과 식별의 기준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의 의도

나는 지침서를 읽어 나가거나 구절구절을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 교육방법론적 측면들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기본적이고 중요한 언명들을 모으며, 몇몇 주석들을 지적하고 더 깊은 성찰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언명들을 세 부분에 걸쳐서 배열한다: 몇몇 영성적 원칙들, 양성을 위한 몇몇 목적들, 몇몇 양성적 장소들, 경우들, 혹은 수단들.

나는 이렇게 하는 동안에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거의 거부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서둘러 사과 드린다.


정의, 평화 에 있어서의 몇몇 영성적 원칙들

모든 양성은 특정 영성에 의해서 지탱된다. 마찬가지로 정의, 평화 양성도 어떤 영성, 즉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을 이해하는 방법, 자신이 사는 사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으로 향하는 인간 여정을 이해하는 어떤 방법을 전제한다. 나는 제 1부에서, 지침서에 현저하며 정의 평화 영성 정의와 평화이신 예수를 따르는 영성; 희생자들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영성; 육화와 실천의 영성의 틀을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를 강조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영성

예수를 따름은 지침서, 그 중 특히 첫번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차원들 중의 하나이다; 예수를 따름 이란 표현은 20번 이상 사용된다(Presentation: nn. 1; 3; 5; 6; 8; 9; 10; 11; 12; 16; 17; 20; 30; 35; 36; 41; 44; 56 3a; 132; 142). 양성기에 있는 형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 더 엄밀히 말해서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를 세상에 증거하라고 부르심 받은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1; 15; 29; 36; 57), 가난하고 겸손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17)의 제자 (1;5;26)이다. 이것이 양성기에 있는 형제들의 신원이다. 이것이 양성의 관점이며 지평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의 평화 양성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를 따름이 정의 평화 운동에 기반과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며 작은 형제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양성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예수의 추종자들, 제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프란치스칸 관점에서는 정의 평화 양성이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서의 그리고 예수를 따르기 위한 양성을 장려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추종자가 된다는 관점에서의 양성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정의,평화에 관련된 원칙들, 구상들, 가치들을 배우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그 분을 적극적이고 인격적으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은 따르는 데에 있지 단순한 사상적 가르침에 의한 것도 아니며 의지력에 의한 실천도 아니며 더 나아가 피상적 모방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의와 평화는 이념이나 의지로 격하될 위험이 있다. 정의와 평화는 단순히 어떤 형제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사명의 연속이다. 이것은 단순한 일련의 활동이 아니다. 대신 이것은 자신의 희망, 염원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모든 이들과의 유대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바로 그 분과 인격적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희생자들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영성

지침서에서 몇몇 언명들을 뽑아보자. 양성기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 생활 안에서 하느님께 귀 기울일 수 있는 관상 태도 (60)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지침서에서 영속적 양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모든 양성에 유효하다: 그것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여정이며, 인격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이고, 자신 안에서, 형제들 안에서, 봉사활동 안에서, 자신의 고유 문화 안에서, 모든 현실재 안에서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57) 33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작은 형제들은 자신의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 상황 속으로 육화된다. 그들은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여러 얼굴들을 발견하고 그 사람들 안에서 적합한 프란치스칸 삶의 양식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작은 형제들은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여러 특성들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단순히, 자신들과 함께 사는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 가운데서, 현재 볼품없는 사람들 안에서, 가까이 있고 그들을 편애하는 하느님의 영광과 고통과 단호함이 숨겨져 있고 드러나는 곳에서. 양성기에 있는 형제는 자기 마음과 시선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그 얼굴과 (또 다른) 얼굴들에 친숙케 해야 한다. 프란치스칸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본다. 이 시선은 양성의 목적과 수단일 뿐만 아니라 영성의 근본 원칙이다: 양성의 목적은 이 시각을 배양케 하는 것이며 이 시각은 형제들을 양성한다. 예수의 추종자이자 신앙인인 작은 형제들에게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세상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참되게 되는 (J. Sobrino) 길이며, 하느님의 실재뿐만 아니라 세상의 실재에 충실한 길이다. 하느님은 희생자들의 불행을 보시고 그 외침을 들으시며 그 고통을 아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또는 하느님이 존재하시는지 묻지 않고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는다. 아우슈비츠와 엘살바도르와 르완다의 어디에 하느님이 계시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언제나 도시 밖에,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계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들과 함께 못박히신다. 희생자들을 보시고 그들을 더 아끼시는 하느님께서는 희생자들의 (얼굴로부터)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들 안에서 보여지시기를 원하신다.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불의는 하느님을 숨기지만, 희생자들이 있는 세상에서 하느님은 그들 안에서가 아니면 추구되고 발견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단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희생자들의 (현실)에서부터 하느님을 믿는 것 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희생자들과 가까이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을 선택하는 것, 달리 말해 정의와 평화를 선택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하느님 체험의 기회 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확실성을 획득하거나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를 더 아끼신다는 것을 심적이고 실존적으로 체험하는 데에 있다. 이처럼 양성의 문제는 현대 세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정신적, 정서적, 실존적으로 준비하는 데에 있다.


육화되고 실제적인 영성

지침서는 말하기를 작은 형제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들 안으로 육화한다. 그들은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여러 얼굴들을 발견해야 한다. (33) D. Bonhoffer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삶 가운데서 사람을 받아들였다. ; 변두리가 아닌 세상과 생의 한가운데에서, 적막한 광야에서가 아닌 불의에 대한 저항과 평화를 위한 충돌 가운데에서. 정의와 평화의 정신 안에서의 양성은 불의와 대립, 희망들과 계획들이 뒤엉킨 삶에 뿌리를 둔 영성에 의해서 활성화되고 지탱된다.

우리는 인격적 및 영성적 양성을 위한 결정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생의 한가운데로 육화되셨다면, 삶과 세상과 인류의 한가운데에서 출발해야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변화의 체험을 계속할 수 있다. 영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육화된 영성, 이는 그 현현과 하느님과의 만남의 자리에 대해서 실재에 깨어있다. 내밀한 영성이 아닌 타인에 대해 열려있는 영성; 자신에게로 향하는 영성이 아닌 타인들에게로 향하는 영성. 도피의 영성이 아닌 투신의 영성. 침묵과 자기중심적인 영성이 아닌 참여적이고 할동적인 영성; 영성가적이지 않고 영성적이며, 생명을 주고 변화시키는 성령을 양식으로 삼음; 사회화 관련된 그 만큼 인격적인 영성. 그것은 외부로 더 열리고 외부에 대해서 더 열리는 만큼 더 깊고 더 내면적이다.

이 모든 것은 영성과 매일매일의 살아있는 실천이 연결될 것을 요구한다. 그 목적이 활동 속에서 영성의 내용을 잃어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대신 영성을 변모의 출발과 원천으로 삼자는 것이다. 지침서가 양성 일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모든 영성에 타당하다: 그것은 체험적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개인의 고유한 삶과 은사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특정 프란치스칸적 양식의 구체적 경험과 일상 생활 안에서의 가치들을 장려한다. (47); 그리고 그것은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운 것을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48) 그것은 청원자들(1283)에 대해서, 그리고 수련자들(142)과 유기 서원자들(153), 사도직을 준비하는 이들(175;177)에 대해서 삶과 구체적 경험에서 오는 양성의 필요를 역설한다. 단순한 교조나 한갓 이상적 동일화는 양성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신앙에 의해서 비추어지고 신앙 안에서 살아진 실재와의 접촉에서부터 나온다. 실재의 심저에서 나와 우리를 모든 형태의 삶, 특히 위협받은 삶을 찬양하는 종으로 만드는 영성.


정의와 평화 를 위한 몇 가지 양성 과제들

양성을 주도하는 이러한 영성 원칙들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더 정확하고 구체적일 필요성도 있다. 이 둘째 부분에서 나는 지침서가 양성에 부과하고 있고 정의, 평화와도 관련이 있는 과제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모든 혁명들이 실패한 듯 보이고 모든 유토피아가 사라진 세상, 회의주의와 혼돈과 무기력함과 불가피함의 이념 이 자라는 세상에서, 프란치스칸 양성이 노력해야 할 것은 형제들이 복음을 오늘날 세계에 효과적으로 육화시킬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과제는 양성의 여러 과제들 중 평범한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 반대로 이것은 다른 과제들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과제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프란치스칸 양성은 형제들 가운데에 세가지 태도와 활동을 키워야 한다: 프란치스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 극빈자들에 대한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연민, 평화 안에서 정의를 위하며 정의 안에서 평화를 위하는 활동.


실재를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보기

이 점은 지침서의 수련기에 대해 언급하는 짧은 조항에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단계의 양성에 적용될 수 있다: 수련자들은 프란치스칸 관점으로 실제 삶을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며 그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143) 무엇이 프란치스칸 관점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와 프란치스꼬가 더 사랑했던 이들, 이 세상에서 후원자도 친구도 없는 사람들. 모든 관점들과 마찬가지로 이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복음화했고 프란치스꼬가 생활양식화 했던 하느님의 편애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알고,,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실재에 참여하는 것 : 이것이 프란치스칸 양성의 목표이다. 우리가 실재를 어떻게 보고, 알고, 판단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극도로 불확실한 시대, 무방향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실재에 대한 보편적 판단들을 의심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유혹이 될 수 있다: 모든 기준을 거부하는 유혹. 우리가 복잡성의 은하계 (J. Garcia Roca)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단순화를 피하고, 도그마적 확실성이나 이념적 교의들, 모든 것들 다 이해한다는 식의 체제로 돌아가려 하지 말아야 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작은 형제들은 지침서에 있는 것처럼 사회와 세상에 대해 비판적 태도 (162)도 가져야 한다. 문제들과 그 원인들을 알 수 있도록 사물들의 실재를 파악하는 감각 (180)을 기르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프란치스칸적 시각을 획득하여, 사건들에 대해 균형 잡히고 비판적인 판단력을 개발해야 한다. (32) 균형 잡힌 판단 이란 물론 아무런 치우침 없는 중립적인 판단은 아니다. 그런 판단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불의의 상황들을 합리화하고 옹호한다; 대신 내가 말하는 판단은 복음적 명쾌함과 편애에 고무된 판단이다. 또한 지침서는, 양성기에 작은 형제들에게 시대의 징표들을 읽을 수 있는(65&1c) 능력을 제공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대의 징표란 소수의 부와 다수의 곤궁의 틈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성은 작은 형제들 안에 명쾌하고 비판적인 세계관을 낳고 심화 시키려 노력한다; 중립적이 아닌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본 편향적 시각;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


우리는 이 과제들을 지침서가 작은 형제들의 신학 공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들과 유사하게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의 신앙이 오늘날의 문제들을 직시하게 하는 것, 신앙의 개인적 사회적 실천 을 명료화하고 장려하는 것, (165) 오늘날 세상과 인간의 이해 (151)를 가능케 하는 것. 우리는, 고통과 기아가 불의이며 또한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현대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불의 앞에서는 중립적 신학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166, 167번에 따라 신학이 지녀야 할 몇 가지 특징들에 주목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기도와 연결된 신학; 구체적 행동을 지향하는 실생활과 밀접한 신학 (166); 창조주에 대한 칭송을 키우고 사람들에게 피조물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며 우리 시대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신앙의 빛을 이용하는 창조 신학;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탄원과 궁핍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구원과 해방을 현실화하는 신학과 그리스도론; 인간과 그 권리를 존중하도록 이끄는 신학; 형제적 세계(정의, 평화, 교회 일치) 건설을 지향하는 신학 (cf. 메델린 총회의 양성에 관한 문헌 59); 매일 자신을 투신할 동력을 발견할 수 있는 종말론적 관점에 굳게 결합된 신학 (167).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실제적 연민

L. Feuerbach는 고통이 사상보다 먼저 라고 옳게 판단했다. 사실, 우리는 고통으로 겪은 것, 더 엄밀히 말해서 고통으로 함께 겪은 것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연민적 지성 (J. Sabrino)이 필요하다. 앞서 내가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짊어져야만 오늘의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것도 말해야 한다: 지식은 반드시 연민을 수반해야 하며, 연일 지구상에 증가하고 있는 다수인 잔여 인구 의 고통을 부담 (I. Ellacuria)해야 한다. 프란치스칸 어휘에서는 이러한 연민을 작음(minority)이라고 부른다. 지침서는 프란치스꼬와 회헌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상기시킨다: 형제들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 가운데서 작은 자로서 살도록, (10조, RegNB 9:2) 마치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모든 피조물의 형제며 종으로서, (22) 권력도 특권도 없는 비천한 이들 가운데서 가난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게 살도록 불림 받았다; 작은 형제들은 가난한 자의 생활과 조건을 선택하고, 그들과 동일화하며, 억압 받고 고통 받고 앓은 이들을 섬김으로써 프란치스꼬를 모방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자신들이 복음화된다. 그리고 명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며, 정의와 평화의 도구로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준다. (25)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침서는 양성기가 형제들로 하여금 작음과 단순함과 나눔의 정신 안에서, 특별히 이 세상의 작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159) 일을 선택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구체적인 사랑만이 현실적이듯,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이에게 실천되는 사랑만이 현실적이듯,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가난한 이들의 선택은 무엇보다 먼저 형제회 안에서, 가장 곤궁에 처한 공동체의 형제들에 대해서 표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지침서는 수련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연로하고 병들고 약한 형제들에 대한 존중과 보살핌은 수련자가 첫서원에 적합한지를 식별하는 기준들 중의 하나이다.
이 작음-연민은 작은 형제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이므로 프란치스칸 정의 평화 양성에 있어서 근본적 목표이다. 양성기는 형제들 안에서 판단과 정서와 마음과 감정이 가장 작은 이들, 즉 제 3 세계와 제 4 세계와 사회의 주변자들J. Garcia Roca는 이를 취약성(vulnerability) 이라 부르는데, 완전히 소외되지도 않았고 사회 안에 완전히 통합되지도 않아 불확실한 존재성, 즉 불확실한 일, 불확실한 정서적 관계들, 자신 삶에 있어서 불확실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을 일컫는다과 일치하도록 자극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적이고 프란치스칸적이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의 선택이 도덕적 명령이나 이념적 확신에서 시작되어서는 안 되며, 마음에서 흘러나와 그 사람 전체에 미치고 그 사람 전체를 변화시키는 연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선택은 은총의 체험이 되며 무상적 사랑의 표현으로서 참되게 살아질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바뀌었다. 실상,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위협을 겪는 정의의 사랑이란 것이 현존한다.

양성의 우선 과제인 작음-연민 안에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경외이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핵심을 포함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지침서에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21; 56&3c; 156;162. 피조물에 대한 사랑 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와 배려를 뜻하며, 경외와 배려의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의 조물이고 형제로서의 존엄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 안에 현존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cf.12). 지침서는 이 피조물에 대한 경외 가 형제들이 성대 서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식별하는 기준들 중의 하나라고 지적한다(165). 양성이 발견하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은, 생태계에서는 어떤 호화 집단의 이기적인 장악이나 부르주아적 영성의 피상적 현현은 있을 수 없고 단지 프란치스꼬의 신앙 중심에 있던 것, 즉 피조물을 착취의 대상이나 인간이 소비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이해하는 것, 그리고 개개 피조물의 불가침 권리에 대한 존중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양성은 생태계 문제가 모든 피조물의 생존권의 문제라는 것, 우리 뒤에 지구상에 살 모든 존재의 생존권 문제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생각과 마음의 실존적 우선관심사가 등장하며, 양성은 이를 형제들 안에 자극하고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이고, 효과적이며, 일관되고, 지침서가 제공할 수 없는 과정의 일부인 교수법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판단의 기준들과 양성기 형제들의 실제적 선택들이 연민-작음으로부터 형성되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많은 지원자들의 지극히 피상적인 이상을 순화하고 실제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우리 세계의 특권층에 길들여진 눈과 습성들을 예수님과 프란치스꼬가 선택했던 것들로 대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런 선택들이 무엇보다 수련기에서부터 활성화되고 영적으로 강화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유기 서원기 때에 여러 단계의 체험들과 가난한 이들과의 실제적 만남을 제공하여 그 선택이 매일매일의 삶 속에 계속 뿌리 내리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양성자들과 양성기에 있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와 평화는, 흔히 그렇듯이, 모호한 염원이나 공허한 문구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있다.


평화 안에서 정의를 위하고 정의 안에서 평화를 위하는 활동

정의를 위한 행동과 평화를 위한 행동. 이들은 불가분적이다. 이들은 동일하다. 이들은 양성에서 하나의 목표를 이루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지침서에 의하면, 작은 형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며 피조물을 존중한다. (21); 그는 자신을 변화시켜 정의와 평화의 도구 (25;32), 정의와 평화와 화해의 사자 (180a)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양성이 지향하는 바이다. 정의와 평화의 추구 (56 2b)는 양성기에 있는 이의 그리스도인적 성장을 위한 구체적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정의, 평화, 그리고 피조물 존중에 대한 의식 은 성대 서원 적합성 기준들 가운데 하나로 드러난다. 사회를 정의, 평화, 피조물 존중으로 변모시키는 데 참여 (162)할 수 있는 능력이 양성 일반의 목표에 포함되어 있다. 요약한다면, 정의와 평화는 피조물 존중과 함께 양성의 원칙이자 척도이며 목표이다. 지침서와 더불어 좀더 구체화해 보자.

한 편으로는 정의를 위한 행동. 우리 세계와 사회에서 소외되고 취약한 이들이 불의의 희생자들인 만큼, 그들에 대한 연민도 불의에 대항하는 행동, 정의를 촉진하는 행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침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작은 형제들은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형태의 불의, 비인간적 구조들을 제거하는 데에 깨어 있고 이를 위해 일해야 한다. (25); 그리고 작은 형제들은 인간 존엄에 반하는 모든 것에 격렬히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34). 이 요소도 양성의 핵심 목표에 속한다. 또한 지침서는 항상 기억하고 실천되어야 할 정의 촉진 행동의 한 방향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즉, 자선의 수혜자들이 스스로의 인간적 진보와 자유를 위한 주인공이 되도록 그들을 사랑하는 것 (180a)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정의가 평화의 다른 이름 (바오로 6세)이라면 평화는 완전히 실현된 정의의 다른 이름이다. 지침서는 그 첫 부분에서, 작은 형제는 평화의 사람, (28) 화해와 평화의 전달자 (3)가 되어 화해했고 평화로 가득찬 (22) 사람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으며, 평화의 사자로서 가슴에 평화를 지니고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전한다 (34; cf GG.CC. 68,2)고 주장한다. 화해와 용서에로의 투신 (56, 3c)은 프란치스칸 양성기에 있는 이를 특징지우며, 연민과 화해의 정신 (156)은 성대 서원 적합성의 기준이다.

연민과 화해의 정신 을 지니는 것은 분명, 충돌과 불의의 상황들에서 무기력한 것과 동일하지 않다. 평화의 사람, 평화의 전달자 가 되는 양성은 충돌을 피하도록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며 대신 충돌을 직시하도록 준비시킨다는 뜻이다. 양성은 양성기에 있는 이가 통교하고 충돌을 직시하는 능력 (56, 1b)을 계속 얻도록 돌보아야 하며, 그 시작은 자신의 공동체에서부터이다. 자신의 공동체는 형제들이 이 통교와 충돌 해결 (64) 능력을 증진해야 하는 첫번째 자리이다.

끝으로, 평화 속의 정의, 정의 속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은 위험 많고 실수하기 쉬운 일이다.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복잡성과 불확실성, 심지어는 모호함과 실수들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분쟁에 뛰어들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어떤 증오나 악의의 감정에도 굴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큰 내적 자유와 마음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힘은 초인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난하고 용서 받았으며 불완전하고 충만한 은총을 받았다고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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