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0일(토)
2009년 사제의 해를 시작하며
지난 해 바오로의 해에 이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올 해 6월 19일 예수성심성월부터 1년간 사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이 특별한 교회적 관심을 전 가톨릭 신자들에게 호소하는 이러한 형태는 그 만큼 교회가 특별한 사안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인지시키는 것입니다.
사제의 해.
특별히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르스에서 본당 신부를 하며 자신의 전 생애를 고해성사와 미사 성제를 거행하는
사제의 삶에 모든 것을 바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이라는 것이 더 뜻 깊습니다.
솔직히 이전까지 교회의 많은 성인 성녀들이 있지만, 평범한 한 본당 신부가 성인으로 선포된 예는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본당 신부 생활하면서 솔직히 성인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죠.
올 해 사제의 해로 선포된 것은 그 만큼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에 위기가 크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는 아직은 표면으로 드러난 부분이 크지 않기 때문에,
아니 달리 표현하면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아직은 사제들을 사랑하고 감싸주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다지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황님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사제의 해를 선포한 것은 그 만큼 교회의 사제직에 대한 위기감이 커져가고 있다는 뜻일겁니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듯이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가톨릭 사제들의 정체성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라고 합니다제가 독일에 있을 때 독일 중심으로 전 신자 서명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5가지 핫이슈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제 독신제 폐지, 여성 사제직 허용, 이혼한 이들의 재혼 허용, 낙태 허용, 동성애 허용...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들이 신자들의 청원 비슷한 형태로 제기된 적이 있었습니다.
5가지 모두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사제 독신제는 동방교회에서 이미 사제품 받기 이전에 신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로 되어 있는 것을 로마 가톨릭도 받아들이자는 내용이고, 여성 사제직은 유일하게 가톨릭 교회만이 여성을 사제직에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여성 운동 차원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혼한 이들의 재혼허용은 가톨릭 교회의 혼인법에 대한 반발이었고, 낙태와 동성애는 현대의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가톨릭이 가진 보수적인 윤리 규정에 대한 개방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요청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요청들에 대해 더 놀라왔던 사실은 독일어권 가톨릭 신자들의 반수 이상이 5개 항목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가톨릭의 정체성은 이런 고유한 원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춰야 한다는 대중적인 요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저로서도 참 받아들이기 힘든 요청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들 문제들이 담고 있는 본원적인 문제들을 조금만 더 들여다 본다면 결코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사제직과 관련하여 사제 독신제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은 그 만큼 사제 독신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겠죠.
저도 놀란 사실은 유럽의 많은 신자들이 사제들이 굳이 독신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일상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단지 기능적으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면 되는 거지 굳이 독신이라는 방식으로 사제직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방식일 뿐입니다.
이 번 사제의 해를 선포하면서 교황님은 사제직의 소중함과 사제직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교회적 가치를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솔직히 가톨릭 교회는 사제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존립 근거가 성체 성사를 통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제직은 교회의 제도적 유지를 위해서 기능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인격적으로 위임한 사제적 직무에 대한 확신 속에 근거하기 때문이지요. 한 마디로 사제직은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구원 질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의 신비가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겁니다. 이전 교황님의 회칙에서도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란 내용도 사실은 이런 가톨릭적 기초를 토대로 합니다.
성체성사 없는 가톨릭 교회는 생각할 수 없고,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 없는 가톨릭 미사는 생각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사제직입니다. 사제직의 고귀함을 지키는 것이 가톨릭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고,
거룩한 미사 성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을 지키고 관리하는 가톨릭 사제의 정체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발생하는 일부 사제들의 윤리적 문제들이 사제직의 고귀함을 훼손하는 것으로 크게 보도되면서
교황님은 가톨릭 교회 전체가 간직해온 아름다운 가치들이 일부의 몰지각한 사제들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제로 살아가는 저 역시 이런 위기에 대한 의식을 공유합니다.
사제들은 결코 스스로 완전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상처 받고 혼란스럽기는 일반 신자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스스로 상처 받고 있으면서도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적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은총 속에 늘 살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은총의 특별한 도유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제들을 사랑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문제는 사제직이 과연 본질이냐 기능이냐라는 논란은 계속될 것입니다. 사회가 분화되고, 평신도들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사제들이 과거와 같은 특권과 권한은 사라지겠지만, 사제직이 가진 고유한 가치들은 남을 것입니다.
위기가 결코 정체성의 상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비안네 성인처럼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사제직을 살아가는 전 세계의 수 많은 사제들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자신을 바쳐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수 많은 사제들이 있습니다.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 오체 투지로 세상에 참된 평화를 구하고,
참된 인권회복과 정의 평화를 위해 외치는 이들이 있으며,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게 따스한 손길과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주는 목자들이 있고,
드러나지 않지만,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박해 받는 목자들이 있고,
많은 이들로부터 오해와 편견에 시달리면서도 굳굳이 인내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이 사제직에 올바른 삶을 살고 말고를 떠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는 이들의 의지만큼은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사제들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사제들은 참 복이 많은 이들입니다.
사제직에 대한 고귀함을 스스로 깨닫기 이전에, 이미 더 열심히 사는 평신도들이 사제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죠.
비록 신자들의 사랑을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과 욕심으로 바꾸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사제들은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더 아프고 힘든 시간이 오더라도, 하느님은 사제들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실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 대구에서 전국교수신부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미래의 한국 사제들을 양성하고 있는 양성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서로의 체험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벌서 6년째 이 모임에 오고 있는데, 고민하는 문제는 늘 같군요.
하지만 부족한 양성자의 모습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섭리하십니다.
성소는 양성자 신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시고, 성령의 역사이심을 믿기 때문이죠.
사제의 해는 이런 마음으로 지내는 한 해가 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주님, 세상을 이겨낸 당신의 놀라운 섭리를 사제들 안에서도 이루어주소서" 아멘
출처 :신학하는 즐거움 원문보기 글쓴이 : 송사도요한 신부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9-07-15 08:28:47 묵상나눔에서 복사 됨]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사제에 대한 공경이 남달랐던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제에 대한 공경이
우리의 영성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제가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진정한 목자가 될때
그 의미가 있고,
또한 그러한 바램을 가지고
사제의 해를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생각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