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나서 리포트를 써야하는 책 둘, 즉 요셉과 야곱 중 야곱을 택하였다. 왜냐하면 요셉은 창세기에 드러난 예수님의 모상과도 같은 이미지, 즉 좀 완벽한 쪽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야곱이 더 끌렸다. 야곱의 일생은 험난했기에, 그는 윤리보다 욕망에, 믿음보다 이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고 그 만큼 그의 일생은 내적 고난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21세기 물질문명 위에서 한조각의 믿음을 부여잡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우리, 특히 나와 흡사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의 삶에 끌린 모양이다.
송봉모 신부님이 구약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원숙하고 지혜롭다. 이미 그는 그가 공부한 지식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으로 창세기의 인물들을 그 안에서 만나고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야곱의 아버지인 이사악은 너무나 밋밋한 인물이다. 성조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를 잇는 인물, 이사악. 송봉모신부님의 말씀대로 소년시절에 겪은 충격적 경험, 즉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경험이 준 트라우마가 그의 인생 전체를 평온함에 대한 희구로 몰고 간 것일까. 고향 처녀 리브가를 데려와 결혼한 후 그의 인생은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다. 말년에 그는 야곱과 에사오 중 사냥에 능하고 남성적인 에사오를 편애한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의 사랑은 하느님의 축복과 인정을 얻지 못한다. 왜일까? 왜 하느님은 이 소중한 외아들의 사랑대로 그의 계획을 끌고 가지 않으신 것일까? 그것은 이사악의 에사오에 대한 사랑이 육적 가치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사악은 에사오가 살고 있는 야성적 생활, 사냥과 전투와 모험을 좋아했다. 에사오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받은 주하느님을 잘 섬겨 성조의 가계를 이어가기에 적당한 인물이었는가는 이사악의 마음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사악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좋은 친구가 될 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은 그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마련하실 만큼 엄청난 존재였다. 그러나 이사악은 아버지 덕으로 축복을 받고 평온하게 그의 인생을 살았지만 아버지 만큼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의식으로 들어찬 인물은 아니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투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현세적 욕망과 인간적인 정에 예민한 인물이었다. 그런 존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그 이전의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하느님관계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그가 젊을 때, 하느님은 단지 그에게 상징적인 유산에 불과했다. 그가 순종한 것은 그의 욕망이었고 그 욕망에 따른 삶이 그에게 준 것은 지금 이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서 얻는 것들과 같은 것이었다. 즉 배신,소외,절연,내적 절망 같은 것들이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무리한 방법으로 탈취함으로서 결국 형의 미움을 사 그로부터 목숨을 건지고자 고향을 등져야 했으며 그 결과 그를 사랑하고 희생했던 늙어가는 어머니 리브가를 그녀에게 호의롭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놓아 두고 20년이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 벧엘의 길가에 누운 그에게 과거는 욕망과 투쟁으로 가득 찬싸움의 기억이었고 미래는 혼자서 헤쳐가야 하는 혼돈과 어둠이었다. 그에게는 물적,영적인 어떠한 자산도 남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내적 죽음, 영적 실패를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고독한 순간에 아마 할아버지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하느님의 실존을 느꼈을지 모른다. 아니 그는 정말로 난생 처음, 절대적인 존재 하느님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너무나 열렬하게 하느님을 확신하고 싶었고 하느님을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따를 수록 목마른 인간 탐욕의 비밀을 그는 눈치채기 시작한 것이다 . 하느님만이 그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야곱은 알기 시작한 것이다. 벧엘에 선 야곱에게는 그의 마음에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존재가 느껴질만큼 고독했으니까, 결국 야곱에게 말씀을 건네시기 위하여 광야에 내어 쫓으신 하느님은 처음부터 야곱을 너무나 깊게 아셨던 것이다. 그는 야곱의 욕망을 따르는 결정들 뒤에서 야곱에게 말씀을 건네시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벧엘의 고독 속에서 하느님은 야곱의 무의식으로 들어오신다. 야곱의 환상 안에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통교했던 하느님이 그의 인생에 드디어 직접 개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야곱과의 관계를 확인해 주신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버림받은 존재 야곱은 하느님이 싸우신다 라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분의 현존안에서 완전한 절망은 없다는 것을. 하느님은 반드시 그분의 방식과 시기대로 그의 약속을 지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전혀 하느님의 사람 같지 않은 야곱을 변화시켜서 지켜 나가시겠다는 하느님 의지의 발현이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의 야곱을 오직 하느님의 거룩하심으로 일으켜 그의 인간구원 약속을 실현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안에서 하느님의 어버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구원은 그 전부가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영원히 죽기전에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약속에 따르는 구원계획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인생을 리모델링하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동의는 자기중심의 삶을 돌이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 전환에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오직 하느님의 개입과 도우심으로 내 인생이 온전하게 하는 데에 하느님과 협력하겠다는 의지적 동의인 것이다.
야곱의 일생에 또한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연정이다. 그가 보여주는 연정은 성경의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사촌누이 라헬에게 야곱이 보여주는 사랑은 낭만주의가 보편화되어 연애라는 관념이 대중에게 들어온 18세기이후의 수많은 러브스토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라헬은 야곱에게 약속의 여인이었다. 벧엘에서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혼인할 여자를 구하고자 어머니의 고향에 도착한 야곱에게 첫눈에 비친 아름다운 라헬은 하느님 약속의 육화이며 증거였다. 그다지 관념적이거나 영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야곱에게 아름다운 라헬은 바로 그의 고독과 실패 속에서 자신을 현시하신 하느님 영광의 강림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야곱에게는 아직도 영적가치와 육적가치의 혼란이 남아있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안식을 원하던 차에 라헬에게서 그런 것을 발견하였는지도 모른다.
약은 사람은 왜 항상 자신보다 더 약은 사람을 만나게 될까? 교활한 삼촌 라반의 집에서 갖은 고생 끝에 한 재산 챙긴 야곱은 형 에사오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아버지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에사오와의 만남에서 하느님은 야곱을 도우신다. 야곱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감에서 나온 별별 조치로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만 결국, 하느님은 상황을 통찰하시고 야곱을 적절하게 도와 에사오와 화해하게 하신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성조의 가계를 이어갈 준비를 하게 하신다. 물론 아직 요셉을 통한 이집트 이주와 모세를 통한 탈이집트의 여정이 남아있지만 늙고 자식도 없는 초라한 늙은이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몰라보게 튼실해 지고 무게감이 있어졌다. 하느님의 약속은 나무가 자라듯이 어느새 씨에서 싹이 나고 가지가 돋고 잎사귀가 나온다. 온 세상이 이러한 하느님 약속의 실현으로 가득차길. 인간의 의식과 인지를 초월하여 통찰하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