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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이콘]성유물 성화, Staurotheh Icon.러시아.19세기 말.35.5x30.5cm


 


그리스와 비잔틴 지역에서는 일찌기 성유물 성화로 그림의 중앙에 성유물 함을 그려 넣었다.


이와 같은 성화 타입을 러시아에서 받아들였다.


성유물 대신에 이곳 저곳에서 흔히 청동제 십자가를 그리기도 한다.


 


이 성화에서는 청색 에나멜을 칠한 청동제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십자가 위에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그려진 무명수건,


그 아래 첫 횡목에는 2명의 비천(飛天)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다.


두번째 횡목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 양옆에 해와 달을 그려 넣었다.


생기를 잃은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예루살렘의 건물들, 그 아래에는 아담의 해골이 보인다.


십자가의 왼쪽에는 성모와 마리아 막달레나,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애(愛) 제자였던 요한과


개종한 장교 롱기니우스(Longinius)가 서 있다.


 


그림와 왼쪽 윗 부분에는 케루빔 (Cherubim)천사와 오른쪽에는 세라핌(Seraphim) 천사를 알아볼 수 있다.


깊숙이 들어간 화면에 그려진 십자가의 왼쪽과 오른쪽에도 두명의 기독교의 바보를 자처하는 자들이 보인다.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성 게오르기오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성 미나(Minas)가 그려져 있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축일:11월 7일


성 윌리브로드


ST. WILLIBRORD


San Villibrordo Vescovo


Northumbria.England. 658 -


Echternach (Lussemburgo), 7 novembre 739


Willibrord of Echternach; Bishop of Utrecht, Apostle of the Frisians,


and son of St. Hilgis,


 



 


잉글랜드의 노스움브리아 출신인 성 윌리브로드는


일곱 살 때에 로폰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성 윌프리드의 지도를 받았고,


12세 때에는 성 에그버트와 성 위그버트와 더불어 공부하였다.


 


그는 30세 때에 사제가 되었고, 11명의 잉글랜드 사제들과 함께 프리스랜드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교황 세르지오 1세로부터 프리스랜드 설교권을 얻었으며, 페핀 대왕으로부터 큰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695년, 그는 프리시안인들의 주교로 축성되어 그의 주교좌를 우트렉트에 세웠다.


또한 그는 룩셈부르그에 엑테르나크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이 수도원 운동이 덴마크까지 파급되게 하였다.


 


또 그는 찰스 마르텔의 아들 페핀 개종시킴으로써, 그의 선교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는 "프리시아인들의 사도"로 공경받는다.


 



 



 


 


피핀 3세 Pippin III
(영)Pepin Ⅲ.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Pippin der Kurze).
714경~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샤를마뉴의 아버지이다.
747년 프랑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751년에는 이름뿐이었던 프랑크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4)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샤를마뉴, 스투코로 된 조상(9세기경),
스위스 뮌스터에 있는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소장
출처 : Copyright © By courtesy of Weidenfeld & Nicholson Ltd. ; photograph, Ann Mun



샤를마뉴 Charlemagne
샤를 1세, 카를 1세라고도 함.


별칭은 대제(Carolus Magnus/Charles le Grand/Karl der Grosse/Charles the Great).
742경. 4. 2~814. 1. 28 아우스트라시아 아헨(엑스라샤펠).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샤를마뉴는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세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시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낱말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체크어의 král, 폴란드어의 król 등).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독일의 사도.성 보니파시우스 주교 순교자 축일: 6월5일, 게시판180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update 2006.11.6.


 


 



 


 


 


♬Abide with me - Hazell - Anthony Way


 


 


 


 


 


 


 


 


 


 


 


 


 


 


 


 


 


WILLIBRORD


 


Also known as


Willibrord of Echternach; Apostle of the Frisians


Memorial


7 November


Profile


Son of Saint Hilgis. Educated at Ripon and Ireland under Saint Egbert. Missionary to Friesland and Luxembourg with Saint Swithbert. Benedictine monk. Bishop of Utrecht. Worked with Saint Boniface, Saint Rumold, and Saint Adalbert of Egmond. Founded monasteries.


Born


658 at Northumbria, England


Died


7 November 739; relics at Echternach


Patronage


convulsions, epilepsy, epileptics, Holland, Luxembourg, Nederlands


 


 


 


 


San Villibrordo Vescovo


7 novembre


Northumbria, 658 - Echternach (Lussemburgo), 7 novembre 739


 


A trent’anni ricevette l’ordinazione sacerdotale, dopo di che insieme a undici compagni si dedico all’evangelizzazione della Frisia (Paesi Bassi) e di una parte della Germania. Anversa fu la prima residenza e il centro dell’apostolato di Villibrordo, fu l’avamposto e forse il Seminario delle fondazioni di Utrecht. La consacrazione episcopale, ricevuta a Roma, avvenne la domenica 24 novembre 695, antivigilia della festa di S. Clemente. In quella occasione il papa dette al nuovo arcivescovo il nome di Clemente. Per parecchi anni, senza un attimo di tregua, percorse la Frisia, la Fiandra, il Lussemburgo e le rive del Reno predicando e costruendo conventi. Dopo una vita dedicata alla preghiera e all’introduzione di vescovi ausiliari la malattia e la vecchia rallentano e interrompono la sua attivita. Mori all’eta di ottantuno anni. Qualche giorno dopo il suo corpo viene deposto in sarcofago nei monasteri di Echternach.


 


Emblema: Bastone pastorale


 


L’evangelizzazione della Germania transrenana ebbe inizio nel VII secolo, sul finire dell’epoca merovingia, per opera dei monaci irlandesi e anglosassoni, e raggiunse il massimo sviluppo nel secolo seguente con l’azione missionaria di S. Bonifacio. Il primo a sbarcare in Frisia, nei Paesi Bassi, fu Vilfrido di York. Poi l’abate Egberto, un maestro di vita spirituale dell’epoca, vi mando Villibrordo (Willibrord), oriundo della Northumbria, dov’era nato nel 658, il cui zelo per la diffusione del regno di Dio sara l’unico incentivo della sua movimentata esistenza.


Questo monaco, che i biografi descrivono piccolo di statura, nero di capelli, di delicata costituzione, con occhi profondi e vivi, incarna il tipo ideale del monaco occidentale: un lavoratore che non conosce pause ne crisi di scoramento, austero, prudente, leale, tenace, devoto al papa. Formatosi nell’abbazia inglese di Ripon, all’eta di vent’anni si era recato in Irlanda per perfezionare la sua cultura teologica sotto la guida dell’abate Egberto, che a trent’anni lo consacro sacerdote.


Dopo l’insuccesso della missione di Vilfrido, fu mandato con undici compagni in Frisia. La vittoria di Pipino di Heristal sul re Radbod nel 689 rese piu facile l’impresa. Sbarcati all’imbocco dell’Escaut, una regione di terre acquitrinose, i missionari si diressero all’interno, accolti con grandi onori dal duca Pipino. Ma Villibrordo, prima di dare inizio alla sua opera di evangelizzazione, volle recarsi a Roma per avere il beneplacito del papa. Da Sergio I ebbe approvazione e incoraggiamento. Al rientro, il monaco scelse Anversa come centro del suo apostolato e come avamposto delle future fondazioni, tra cui la piu celebre fu quella di Utrecht.


Per l’erezione della nuova diocesi in Frisia, Villibrordo si reco nuovamente a Roma, dove il papa Sergio I il 21 novembre 695 lo consacro vescovo, col nome di Clemente (24 anni dopo Gregorio Il fara altrettanto col monaco sassone Vinfrido-Bonifacio). Da questo momento sarebbe arduo elencare tutti i viaggi dell’infaticabile missionario, dalle rive del Reno fino alla Danimarca. Fondato a Echternach (Lussemburgo) un piccolo convento, vi mori il 7 novembre 739 a ottantun anni di eta.


Fu un uomo di azione e di preghiera e soprattutto un grande organizzatore con uno spiccato senso del comando, che gli consenti, grazie anche alla formazione di vescovi ausiliari (una novita per l’Occidente), di evitare il frazionamento delle varie Chiese con la conseguente dispersione dell’attivita pastorale.


 


 


NOVEMBER 7


ST. WILLIBRORD


 


Willibrord was born in England in 658. He was educated for many years at an Irish monastery. Most of his life he was a missionary in lands which today are Germany, Holland, Luxemburg and Denmark. He had long had a great desire to preach the Gospel to the nonbelievers of those countries. At last, his dream came true. With the encouragement of the pope, who made him a bishop, St. Willibrord led many people to accept Christianity. The king of the Franks, Pepin, also cooperated with Willibrord.


One very stubborn king made it hard for the saint. This was Rodbod, king of Upper Friesland. At one time the missionary’s ship was driven onto an island which the pagans of Denmark and Friesland ( a province in the north Netherlands) considered sacred to their god. No one was permitted to kill any animal on it. They could not eat any vegetable or fruit that grew there, or draw from its spring, unless in complete silence. To show them that their god did not exist, St. Willibrord killed some game to provide food for his companions. He also baptized three persons in the spring. Hearing him pronounce the words, "I baptize you" loudly, the pagans felt sure he would drop dead. Of course, nothing happened. King Rodbod was told of this event and he ordered that one of the Christians should die to "calm the god’s anger." So it was that one became a martyr.


After this king died, St. Willibrord eagerly went ahead converting many nonbelievers. Although he was growing very old, nothing could stop this apostle. He was still a fine-looking man, cheerful, wise, devout. He was full of love and concern for people right to the end of his life. Bishop Willibrord died in 739.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superstitions in our own time. Can you think of some? St. Willibrord is a good saint to pray to for keeping us away from superstitions.


 


 


 


 


St. Willibrord


 


Bishop of Utrecht,


Apostle of the Frisians,


and son of St. Hilgis,


born in Northumbria, 658; died at Echternach, Luxemburg, 7 Nov., 739.


Willibrord made his early studies at the Abbey of Ripon near York, as a disciple of St. Wilfrid, and then entered the Benedictine Order. When twenty years old he went to Ireland and spent twelve years in the Abbey of Rathmelsigi (identified by some as Mellifont in Co. Louth) under St. Egbert. From him Willibrord and eleven companions received the mission to Frisia, at the request of Pepin. They came to Utrecht but did not remain there, repairing to the court of Pepin. In 692 Willibrord went to Rome, received Apostolic authorization, and returned to his missionary labours. At the wish of Pepin he went for a second time to Rome, was consecrated Bishop of the Frisians by Sergius III (21 Nov., 695) in the Church of St. Cecilia, and given the name of Clement. He also received the pallium from the pope. On his return he laboured among the people assigned to him; to raise recruits for future apostolic work he founded a monastery at Utrecht, where also he built a church in honour of the Holy Redeemer and made it his cathedral. In 698 he established an abbey at the Villa Echternach on the Sure; this villa had been presented to him by St. Irmina, daughter of St. Dagobert II, the donation being legally confirmed in 706.


 


When Radbod gained possession of all Frisia (716) Willibrord was obliged to leave, and Radbod destroyed most of the churches, replaced them by temples and shrines to the idols, and killed many of the missionaries. Willibrord and his companions made trips between the Maas and the Waal, to the North of Brabant, in Thuringia and Geldria, but met with no success in Denmark and Helgoland. After the death of Radbod he returned (719) and repaired the damages done there, being ably assisted in this work by St. Boniface. Numberless conversions were the result of their labour. Willibrord frequently retired to the Abbey of Echternach to provide more particularly for his own soul; he was buried in the oratory of this abbey, and after death was almost immediadely honoured as a saint. Some relics were distributed in various churches, but the greater part remained at the abbey. On 19 Oct., 1031, the relics were placed in a shrine under the main altar of the new basilica. His feast is celebrated on 7 Nov., but in England, by order of Leo XIII, on 29 Nov. Since his burial Echternacht has been a place of pilgrimage, and Alcuin mentions miracles wrought there. The old church was restored in 1862 and consecrated in Sept., 1868. Another solemn translation of the relics took place on 4 June, 1906, from the Church of St. Peter to the new basilica. On this occasion occurred also the annual procession of the holy dancers (see ECHTERNACH, ABBEY OF. -- The Dancing Procession). Five bishops in full pontificals assisted; engaged in the dance were 2 Swiss guards, 16 standard-bearers, 3045 singers, 136 priests, 426 musicians, 15,085 dancers, and 2032 players (Studien u. Mittheilungen, 1906, 551).


 


No writing can with certainty be attributed to St. Willibrord except a marginal note in the Calendar of Echternach giving some chronological data. On his testament or last will, which is probably genuine, see "Acts SS.", III Nov., 631. In the national library of Paris (No. 9389) there is a copy of the Gospels under the name of Willibrord; this is an old Irish manuscript and was probably brought by Willibrord from Ireland (Bellesheim, "Gesch. der kath. Kirche in Irland", I, Mainz, 1890,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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