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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4

회복기(1953-1972.8.)

T 회복기(1953-1972.8)

형제회 조직과 전국대회

9․28 수복으로 공산군이 물러가자 교우들은 다시 성당에 모여 어지러워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1945년에 파견된 배 쥐스탱 신부에 이어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계속 입국했고, 그들은 재속3회원들을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60년대에 조직된 형제회는 대부분 충남지역이었습니다. 한국에 새로 입국한 공 안드레아 신부는 그 당시 대전의 오기선 신부와 함께 적극적으로 형제회를 도왔습니다. 공 안드레아 신부는 대전과 전라도 지역 회원들을 위해 애썼으며 흩어져 있던 단독 회원들을 모아 형제회를 결성하는데 주력했습니다.
1958년 12월 10일 대전 대흥동 형제회가 서울 형제회에 이어 두 번째 형제회로 조직되었습니다. 이어 당진군 합덕 신리에서도 형제회 조직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도 형제회 창설 움직임이 일어나 1961년 3월 12일 부산형제회가 탄생했습니다. 다시 대흥동 형제회에서 목동 형제회가 분할하고 인천, 김제, 당진에서도 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전국에 형제회가 많아지자 공 안드레아 신부는 제1차 전국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한국 진출 25주년을 맞이하여 첫 전국 대회가 1962년 9월 대전 목동 수도원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전국 8개 형제회에서 35명이 참가한 이 대회의 주제는 ‘평화와 선’이었으며, 전국 형제회 상황이 처음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이 전국적 모임은 서울 형제회와 여러 형제회에 활기를 주었습니다. 이 때 교육과 양성을 위한 잡지 ‘발자취’를 창간하고, 재속3회원을 표시하는 휘장도 만들었습니다. 1963년부터 ‘발자취’는 계간지로 발행하였습니다.
 
한국연합회 발족과 초대 연합회
1963년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제2차 전국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때 한국연합회가 발족되었으며, 초대 지도 신부로 공아영(안드레아) ofm 신부, 한국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장면(요한)이 선임되었습니다. 이어 초대 연합회 주관의 전국대회가 이듬해인 1964년 9월 대전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제2대 전국 지도신부로 최근성(베드로) ofm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1965년 안선호(베다) ofm 신부는 제3대 지도 신부가 되었습니다. 안 베다 신부님은 형제회 피정 지도와 운영에 힘썼습니다. 1965년 9월 제4차 전국대회가 열렸고 ‘3회원의 사도직’이란 주제를 내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쇄신과 평신도에 대한 자각이 높아진 데에 따른 재속3회원의 사도직 역할을 연구했습니다.
1966년 6월 4일에 초대 회장이었던 장면이 67세로 선종했습니다. 이 아뽈리나리스 총장대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소 프란치스칸으로 항구하게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간 그에게 1회 수도자만이 쓰는 수도복 모자(Capuce)를 하사하였습니다. 연합회는 그 후 6년간 공백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1967년 6월 2일, 서울 형제회가 분할하여 대방동 성당에 안토니오 성인을 주보로 하고 오기선 신부를 지도 신부로 하여 형제회 창립 총회를 가졌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설립 형제회 탄생
1958년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국내에 진출(1958. 10. 6)하여 3회를 조직하고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꼰벤뚜알의 지도로 1965년 10월, 당시 대구 범어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지세암(로코) 신부와 본당 주임 황 마리오 신부가 ‘성 프란치스코 재속3회’의 설립을 의논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형제회 설립 후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회의 지도로 1969년 대구시 범어동 본당을 중심으로 꼰벤뚜알 설립 형제회가 창설되었습니다.
한편 꼰벤뚜알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전인 1940년 2월, 대구교구의 박재수(요한) 신부가 단독회원으로 대전 목동에서 도 요한 ofm 신부의 주례로 입회하였고, 재속3회에 대한 지도 권한을 받아 열성적으로 활동한 덕분에 본당 신자 대부분이 재속3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1962년 박재수 신부는 전국연합회 지도신부인 공 안드레아 신부와 상의하여 1962년 10월 16일 안토니오 성인을 주보로 대구 남산동 성당에 재속3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안토니오 형제회는 한 때 회원이 600명이나 되어 각 소속 본당에서 월례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형제회에 적을 둔 회원이 무려 2,400명이나 되었고, 마산, 창녕, 진해, 왜관 등지에서까지 형제회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오 형제회 초대 회장(1962. 10. 16 - 1963. 9. 1)은 단독회원 서약을 했던 김익진(프란치스코) 형제였습니다. 1970년부터 안토니오 형제회는 대전 목동수도원에서 개최된 ‘한국 성 프란치스코 재속3회 연구회’에 참석하는 등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OFM) 설립 형제들과 교류를 가졌고, 전국 지도신부였던 공안드레아 신부를 피정에 초대하는 등 자치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T 관련연혁

1958. 12. 10         대전 대흥동 형제회 설립
1961. 3. 12           부산형제회 탄생, 이후 인천, 김제, 당진에 형제회 설립
1962. 9. 18-21     제1차 전국대회 및 한국 전래 25주년 기념식(대전 목동수도원, 8개 형제회 35명 참가)
1963. 9. 17-20     제2차 전국대회 개최, 전국 연합회 창설, 대전 목동수도원 - 초대 회장 : 장면(요한), 지도신부 : 공아영(안드레아) 신부
1964. 9.                제2대 지도신부 최근성(베드로) 신부 취임
1965. 2                 제3대 지도신부 안선호(베다) 신부 취임
1966. 6. 4             초대 회장 장면(요한) 선종
1970. 8. 25-27    ‘프란치스코 재속 3회 연구회’ 개최, 대전 목동수도원
1972. 7                 제4대 지도신부 공아영(안드레아) 신부 취임
1972. 8. 20          제6차 전국대회 개최 및 제2대 연합회(회장 : 이순석 바오로) - 연합회 규약초안  제정 
                                 내용     - 단독 회원제와 수도명 폐지,
                                            - 서약이 유기와 종신으로 구분됨. 연합회 월보 발행
                                           -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성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 명칭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