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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2월24일(2월25일)


복자 마르코 마르코니
Bl. Marc Marconi
Beato Marco De' Marconi Sacerdote
Mantova, 1480 - Mantova, 24 febbraio 1510
Beatified: 2 marzo 1906 by Pope Pio X



2월 25일 복자 마르코 마르코니
마르코 마르코니는 1480년 만투아 근처 밀리아리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심이 깊은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일찍부터 그는 뛰어난 성덕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3회 회칙을 지키며 만투아에서 살고 있던 성 예로니모의 은수자들에게 특별히 마음이 끌렸다. 그들의 기도신심과 겸손에 탄복하여 그는 만투아에 있는 성 마태오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청했다. 수도생활 처음부터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어려운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활동을 할 때 그가 지녔던 헌신과 쾌활한 자발성으로 인해 수도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유일한 바람은 가능한 한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의 신심을 보시고 예언과 기적의 능력을 선물로 응답해 주셨다. 사람들은 그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그의 수도복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 했다.
30세 때 이미 하느님은 그가 하늘나라에 합당하다고 여기시고 천상으로 부르셨다. 그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은 채 만투아 성 마태오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그는 “만투아의 영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1906년 3월 2일 교황 비오 10세는 하느님의 이 종에게 영원한 경배를 드리도록 허락했다.



기도
오 하느님, 당신의 증거자인 복자 마르코의 축일로 저희를 기쁘게 해주셨으니, 그의 축일을 지키는 저희가 그의 생활양식을 본받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또한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업적들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밀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는 종은 복됩니다. 영적인 권고 28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THE SAN DAMIANO CROSS




시복 諡福
라틴어 beatificatio 영어 beatification



로마 가톨릭 교희에서 그 성성(聖性)이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자에게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주어 특정 교구, 지역, 국가, 혹은 수도단체 내에서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황의 선언. 절차는 시성(諡聖)과 거의 동일하나 무류성을 가진 행위는 아니다.


그 절차는 생전에 탁월한 신앙의 모범을 보였던 고인(故人)의 성성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면 지역주교는 시복준비조사위원회를 결성하여 교황청에 시복조사를 건의하기 위한 일반자료조사 과정을 시작, 고인의 언행 저서 기적사례 등을 엄밀히 조사하고 이 결과를 시성시복성성에 보낸다. 성성은 보고된 문서를 조사한 후 교황에게 보고하여 교황이 이를 검토하여 시복조사에 관한 허락을 내리면 본격적인 시복조사가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시복절차는 지방 주교로부터 교황에게 넘어간다.


시복의 최종결정은 교황이 참석하는 어전희의(coram Sanctissimo)에서 결정되는데, 그 이전에 시복 대상자가 실제로 영웅적 덕을 갖추거나 순교를 하였는가 여부,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 문제들의 근거를 캐는 역사연구, 기적 여부와 그 기적이 심사대상자의 통공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밝히는 기적심사, 그리고 시복을 위한 모든 과정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토의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복과 시성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요구되는데, 새로운 법에서는 순교사실만 확인되면 순교자는 기적심사가 면제된다. 한국순교자들의 시복식은 1925년과 1968년 두 번 있었는데 시복을 위한 제반절차는 전자가 1857년에, 후자가 1880년에 시작되었다.



시성 諡聖
라틴어 canonizatio 영어 canonization



로마 가톨릭 교회 교황이 이미 시복(諡福)된 복자를 성인의 명우에 올리고 전세계 교회로 하여금 그를 공경할 수 있도록 하는 선언을 말한다.


교회역사 초기에 신자들의 공경을 받았던 인물은 주로 순교자로서 이들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영생(永生)을 얻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와 지상의 교회를 중계한다고 생각하였다. 313년 종교자유칙령으로 박해가 종결되면서 신자들의 이러한 신앙은 신앙의 증거자(confessores fidei), 교리의 탁월한 수호자(교회 박사), 사도적 열성과 자선 및 복음정신이 뛰어난 자, 참회와 엄격성으로 신자로서 모범적 삶을 영위한 자 등으로 확대되었다. 6~10세기에 성인으로 숭배되는 자가 크게 늘어나자 처음에는 지방주교가, 후에는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이를 인가하는 관습이 생겼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로 교황이 인가한 성인은 성 우달리코(St. Udalicus)였으며(973년), 차츰 시성에 관한 절차법이 갖추어졌다. 그레고리오(Gregorius) 9세는 1234년에 합법적 조사방식을 책정하였으며 식스토(Sixtus) 5세는 1588년 역사와 교의상의 발전을 에서 공식화 하여 시성을 위한 교황청 업무를 유기적으로 분할하였고, 특히 이를 전담할 예부성성(禮部聖省)을 설립하였다. 우르바노(Urbanus) 8세는 1642년 을 발행하여 재위기간 중에 발표된, 시성에 관한 모든 법령과 해석을 실었으며 18세기 베네딕토(Benedictus) 14세는 를 발표하여 예부성성의 경험들을 집대성하였다. 현재는 시성시복 성성에서 이를 담당하고 있다.


시성은 이미 시복되어진 복자(福者)에 한해서 행해진다. 시복에 이어 그 복자의 전구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보고되면 심사는 재개되고 시복과정이 시성을 위해 반복된다. 시성이 결정되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엄숙한 시성식이 열리고 교황은 시성선언을 통해 그 대상자가 영원한 광명 속에 있으며 세계 교회는 그에게 성인에게 합당한 공적 공경을 바칠 것을 명하게 된다.


성인은 복자와는 달리 전세계 교회에 의해 공경되며, 그에게 바치는 공적 공경이란 미사 경본과 사제의 성무일도에 기도문이 삽입되고 전례력에 축일이 도입되며 성체행렬에서 그 유해를 공경하는 일 등을 말한다. 성인은 하느님께 지상의 신자들을 위해 전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완전성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시성된다. 또한 시성은 교황만이 할 수 있는 무류성을 가진 행위다.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사목 방문차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복자 103위가 시성되었는데 이 시성수속에서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고 아비뇽 교황 시대를 제외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 밖에서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모든 성인 대축일:11월1일, 게시판1448번
(Feast of All Saints, Sollemnitas Omnium Sanctorum)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인공경 聖人恭敬
라틴어 cultus Sanctorum 영어 veneration of Saints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전승(傳承)을 통하여 이어져 온 교회 영성(靈性)의 한 요소이며
한때는 신자들의 전례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가톨릭 신심(信心)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성인공경에 관하여 종교개혁자들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 남용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당부하였다(Denz. 984-988).
공의회는 성인의 전구(轉求)가 하느님의 말씀에 반대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한 분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1디모 2:5)의 영예를 해치는 것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우리의 주님, 홀로 우리의 구원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들을 불러 도움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고 유익한 일이라 하였다(Denz. 984, 989).

성서에는 성인공경에 대하여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 없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구원 성업(聖業) 내에서 발휘하는 중개자의 기능이 나타나 있는데
대사제, 천사들, 과거의 위대한 인물 등이 중개자에 속하였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자 피로써 증언을 한 순교자들이 생존자를 위하여 전구한다고 이해하였다(2마카 15:12-16, 7:37).
신약성서에서 이 중개자의 기능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고
그의 십자가상 죽음과 종말에 있을 재림 때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다른 모든 중개자들은 빛을 잃는다.

이밖에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과 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성성(聖性)을 본질적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의 구성원들은 성인(聖人)들이라 불린다(로마 1:7,15:25, 1고린1:2, 16:1).
성서는 또한 교회의 개개 구성원들이 구원에 있어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구성원들은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성령의 다양한 선물을 받았고,
그 선물의 능력을 서로에게 이익되게 발휘함으로써 공동체가 건설된다는 의식을 가진 것이다(1고린12 참조).
이 하느님의 백성은 구세사의 과정에서 '증인들의 구름'(히브 12:1)과 결합하나,
이 증인들의 구름은 하느님 백성의 마음속에 익명의 집합체로 남아 있지 않고 사도들과 순교자 개인별로 기억되었다.

이들을 존경하고 전구를 청한 사례가 문서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2세기 중엽이다(폴리카르포의 순교록 XVII, 3).
박해가 끝나자 이들 증인들의 구름은 증거자들로 인하여 더욱 많아졌다.
이들에 대한 존경의 성격이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자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하느님에 대한 존경을 흠숭지례(欽崇之禮, adoratio)라 하고
성인들에 대한 존경을 공경지례(恭敬之禮, veneratio)라 하여 양자를 구별하였다.
이 구별은 중세기를 통하여 신학의 규범이 되었다.

조직신학에서 성인공경 문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교회론에 속한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주제를
교회헌장(제7장 지상 여정 교회의 종말적 성격과 천상 교회와의 일치)에서 다루고 있다.
성인공경이란 교회의 종말론적 차원에 대한 부단한 인식이다.
"세상의 종말은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며(1고린 10:11)
세상의 쇄신도 이미 결정적으로 현세에서 어느 정도 미리 실현되고 있는 것이니"(교회헌장 48)
참된 종말론적 성성이 이미 교회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 성성은 하느님을 직접 뵙고 있는 천상 교회의 신자들과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신자들과 지상 여정에 있는 신자들에게 모두 존재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완성에로 초대하는 하나의 부르심에 바탕을 둔
교회의 단일성과 하나의 세례는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이를 포용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인들을 인정함은 곧 교회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이룩한 하느님 은총의 승리를 찬양하는 셈이다.
이 인정과 찬양이 교회 내에서 이해되고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익명의 집단으로만 언급될 수 없고 이들 증인들을 호칭하여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성인공경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신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욱 완전케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한 가정을 형성한 우리 모두가(히브 3:6)
서로 사랑하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聖三)을 함께 찬미함으로써 서로 교류할 때에
교회의 깊은 내적 생명을 다하는 것이며 완성된 영광의 전례를 미리 맛보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인공경은 우리의 행동적 사랑의 깊이에 있으며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성인들의 생활에서 모범을 찾고 통공에서 일치를 찾으며 전구에서 도움을 찾는다(교회헌장 51).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면서
성인들과 아울러 공경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라는 계시진리와,
현양받으신 주님의 인성(人性)이 구원에 있어서 발휘하는 영원한 기능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밝혀질 수 있다.
[참고문헌] Ernst Niermann, Veneration of Saints,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7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중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1969
(가톨릭대사전에서)









♬태양의 찬가







Beato Marco De' Marconi Sacerdote
24 febbraio
Mantova, 1480 - Mantova, 24 febbraio 1510


Il beato Marco de' Marconi visse solo 30 anni, dal 1480 al 1510, e rimase sempre nella natia terra mantovana. A 16 anni entrò nel convento di Migliarino, tenuto dall'Ordine di San Girolamo, famiglia eremitica nata in Spagna a fine Trecento. I suoi 15 anni di vita religiosa trascorsero nel nascondimento e nella preghiera. Alla morte la tomba divenne meta di pellegrinaggi e a una ricognizione il corpo fu trovato incorrotto. Il destino delle reliquie si legò a quello del convento di Migliarino e della comunità dei Gerolomini. Quando il primo venne distrutto nella guerra tra imperatore d'Austria e duca di Mantova, i frati si trasferirono in città, costruendo un nuovo convento e una chiesa. La pace durò 150 anni, fino all'età napoleonica, quando il convento fu soppresso e la chiesa distrutta. L'urna peregrinò di nuovo, fino a trovare definitiva sistemazione in cattedrale. San Pio X (già vescovo di Mantova) confermò il culto nel 1906. (Avvenire)


Etimologia: Marco = nato in marzo, sacro a Marte, dal latino

Del beato Marco si può narrare più del periodo dopo la sua morte che della sua breve vita. Esso nacque nei pressi di Mantova nel 1480 da pii genitori, frequentò la vicina chiesa degli Eremiti Girolamiti, a sedici anni attratto dalla vita religiosa, entrò nell’Ordine a Migliarino nei dintorni di Mantova.
Visse come frate quindici anni nel nascondimento, conducendo una vita di preghiera e mortificazione, raggiungendo le vette spirituali che portano alla santità, morì ad appena 30 anni il 24 febbraio 1510.
La sua tomba divenne meta di pellegrinaggi e il suo corpo dopo anni fu trovato incorrotto ed intatto; artisti di chiara fama lo raffigurarono con l’aureola a Mantova, Riva del Garda, a Venezia, Verona, Ferrara, Roma e Napoli e dovunque il culto si propagò e le grazie piovvero abbondanti.
Durante la guerra fra l’imperatore d’Austria e il duca di Mantova, Migliarino fu rasa la suolo come tutte le costruzioni in muratura intorno alla città. I girolamiti si rifugiarono in Mantova con tutte le loro cose compreso il corpo del beato, poi ricostruirono una chiesa e un convento sempre sotto il titolo di s. Matteo e vi deposero il corpo che vi rimase per circa 150 anni.
Alla fine del XVIII secolo durante l’occupazione napoleonica, fu soppresso il convento e distrutta la chiesa, l’urna riprese a migrare da una chiesa all’altra di Mantova e finalmente ebbe la sua definitiva sistemazione nella cattedrale.
I vescovi di Mantova a partire dal 1830 si adoperarono affinché il culto del beato Marco fosse ufficializzato dalla Chiesa e fu proprio il vescovo di Mantova Giuseppe Sarto divenuto papa e santo con il nome di Pio X a confermare il culto il 2 marzo 1906. Festa il 24 febbraio.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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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4-Feb-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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