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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10월 23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St.JOHN of Capistrano


St. Joannes a Capestrano, C


San Giovanni da Capestrano Sacerdote


Capestrano, L’Aquila, 1386 -


Tarvisio, Villach, Austria, 23 ottobre 1456


John = God is gracious


군종신부들의 주보성인. 법조인의주보.작은형제회.


 



 


성인의 서거 500주년 기념 바티칸.1956.#215


 


1386년 이탈리아의 카페스트라노에서 태어났다. 페루지아와 나폴리에서 수학하고 유명한 판사가 되었다.


백성들의 소요 중에 포로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나오고 깊은 신앙적 위기를 겪고 나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절친한 사이로서 그와 함께 작은형제회의 쇄신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평화를 이루는 이로서, 이웃사랑의 사도로서 온 유럽을 두루 다니면서 설교했다.


 


이단자를 대적하고 회교도에 대항할 십자군을 독려하였으며 그 중에 특히 1456년 벨그라드의 승리에는 그의 공로가 컸다.


바쁜 생활 중에서도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1456년 10월 23일 일록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행방불명되었다.


 



 


 


요한은 1386년 6월 24일 L’Aquila에 가까운 Capistran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작이었다.그 가족은 그 지역 정치와 당파 싸움의 경쟁과 증오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기에


요한의 어린 시절은 그의 많은 가족들이 살해를 당하는 슬픈 역사로 얼룩져 있었다.


요한 후에 페루지아로 떠나 거기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페루지아가 Malatesta 군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요한은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이 시기인 1415년에 그는 프란치스칸 형제로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에 그는 Observant(회칙준수)계열인 Monteripido(페루지아에서 가까운 지역)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시기 동안 교회는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문제가 심했던 상황을 겪게 된다.


 


1417년 Constance 공의회는 서방의 대분열(The Great Schism)로 막을 내렸고, 마르티노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제자가 되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있어서 위대한 개혁가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430년에 그는 마르티노 회헌을 제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형제회의 순수한 개혁 시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교황 Eugene 4세는 Observant(회칙준수)운동에 굉장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피스트라노의 개혁 프로그램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1441년에 요한은 성지(1439년에 교황이 Observant로 하여금 성지에 속관구를 세우게 하였음)에서 돌아온 후


이태리 Observant 가족의 총봉사자 대리로 선출되었다.


1446년에 교황 Eugene 4세는 “Ut Sacra Ordinis Minorum”이라는 칙서를 통해 Observant 가족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주었다.


한편 요한 카피스타라노는 성녀 클라라의 회칙 준수에 강조점을 두고 프란치스칸 제2회의 개혁에 있어서 상당히 열심히 일하였다.


(프랑스에서 성녀 콜레타를 만났고, 클라라회를 개혁하려는 그녀를 적극 도왔다.)


 


*성녀 클라라 축일:8월11일.게시판1313번,


*성녀 콜레타 축일:2월7일.게시판938번,1606번.


 



 


교황들은 유럽의 많은 이단들에 대항해서 설교를 하도록 요한 카피스트라노를 뽑아 다른 여러 나라에 자신들의 대사로 파견하였다.


요한 카피스타라노는 유럽의 위대한 사도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는 독일로, 폴란드로, Transylvania로, Moldavia로, 러시아로 두루두루 다닌 사람이다.


 


Muhannad II세 술탄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침공해 들어오자 유럽의 세계는 절박한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은 Turk족의 진출을 막기를 원했다. 이들은 유럽으로 침투해 들어와 Belgrade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1456년 요한 카피스트라노는 투르크들을 대항하여 십자군을 이끌었다.그러나 전투 동안 요한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1456년 10월 23일 Ilok(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690년 알렉산델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카피스트라노를 군종신부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그는 교황의 조언자였으며,이탈리아,폴랜드,헝가리,독일,오스트리아등 여러지역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여


"유럽의 사도"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도적 행위는 다양하였습니다.


40년동안 그는 설교에 전념하여 수많은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을 변신케 하였으며


여러 도시에서 행한 설교에서 단 한번의 설교로 백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프란치스코 회원으로 입회하게 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Madonna Enthroned with the Child, St Francis and four Angels - CIMABUE


1278-80 Fresco, 320 x 340 cm.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낙관적인 사람들로 전해진다.


악의 현존과 그 결과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에 맡긴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의 힘은 죄인들에게뿐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까지 확대된다.


14세기에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인구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40퍼센트가 흑색 죽음에 휩쓸려 갔다.


동시에 서방의 대분열은 교황이라고 자칭하는 두세 명이 교회를 갈라놓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중이었으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도 계속 싸우고 있었다.


당시의 문화와 시대 정신이 암흑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요한은 아퀼라 지방의 카페스트라노에서 1386년에 태어났다.


그는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재능과 성공 또한 대단했다.


그는 26세에 페루자의 총독이 되었다.


말라테스타스와의 전투 후에 감옥에 갇힌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심했다.


결국 30세가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회 수련자로 들어간 그는 4년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설교는 종교적인 무관심과 혼란의 시기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끌어들였다.


그와 12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중부 유럽 국가들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처럼 영접되었다.


그들은 죽어 가는 신앙과 신심을 되살리는 데 도구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자체가 성프란치스코의 규칙에 대한 해석과 실천을 놓고 혼란에 빠졌다.


요한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의 전문적 법률 지식을 통하여


이단적인 ’프라티첼리(Fraticelli)’는 사라지고 ’신성함(Spiritualis)’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희랍 교회 및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애썼으나 불행히도 사소한 진전밖에는 이루지 못했다.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그는 유럽을 방어하기 위한 십자군 모집을 설교할 사명을 받았다.


바이에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약간의 호응을 얻은 그는


헝가리에서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하고 자신도 벨그라드에 군대를 이끌고 갔다.


요한 유냐디 대장의 지휘하에 그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벨그라드의 포위를 풀었다.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은 마음과 몸이 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부산물로 생겨난 전염병에 쉽사리 희생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456년 10월 23일이었다.


 



 


요한의 전기 작가인 요한 호퍼는 이 성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뤼셀회를 상기시키는데


그 회는 완전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조직의 표어는 자율적으로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세 가지 말로 되어 있다.


이 말은 요한의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는 잠시라도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깊은 그리스도교적 낙관주의는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생겨난 신뢰로 온갖 것, 전쟁 문제까지 다루었던 것이다.


 



 


스페인 1969. #1564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에서


 


빌라흐의 헝가리 도시에 있는 성인의 무덤에는 총독이 이런 메시지를 새기게 했다.


"이곳은 카페스트라노 출신으로, 온갖 찬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 요한의 무덤이다.


그는 신앙의 선구자이며 옹호자이고 교회의 파수꾼이며, 자기 수도회의 열성적인 보호자이다.


또한 그는 온 세계의 장식이며 진리와 정의의 애호가이고 생활의 모범으로 가장 확실한 교리의 인도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말로 찬양받을 그분은 천상에서 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실제적이고 성공적인 낙관주의자에게 적합한 비문이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의 「성직자들의 거울」에서


(Pars I, Venetiae 1580,2)


 


덕망 있는 성직자의 생활은 빛과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의 식탁에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칭송받을 만한 윤리 생활의 모범으로 환히 빛나야 하고 온갖 악행의 더러움과 불결을 떨어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처럼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품위 있게 살고 빛나는 사려와 분별력으로 세상의 빛처럼 다른 이들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탁월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과 제자들에게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계자들인 사제와 성직자들에게도 전하신 다음 말씀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름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그러나 악행의 때로 더럽혀져 쇠사슬로 묶인 채 나쁜 표양을 주는 사악한 성직자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 흡사 아주 더러운 흙처럼 짓밟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한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생활로 봐서 멸시받아 마땅한 자는 그의 설교도 멸시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기 교회를 잘 지도하는 사제들 특히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사제들은 두 갑절의 영예를 받아 마땅합니다.


거룩한 사제들은 두 갑절의 영예 즉 직무로 인한 영예와 자기 인격에 기초하는 영예, 세상의 영예와 영적인 영예, 그리고 일시적인 영예와 영원한 영예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서, 사라져야 할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의 제약에 예속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영원하신 임금님의 마음에 드는 슬기로운 봉사자가 되기 위해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하늘로부터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이 자기 자신을 비추기 위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 빛 줄기를 주위에 퍼뜨려 보이는 것을 빛나게 하는 것처럼,


의롭고 정직한 성직자들의 빛나는 생활도 자신의 거룩함의 광명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빛과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지도할 의무를 진 사람들은 자기를 통해서 다른 이들이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생활해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14세기말부터 15세기초에 걸쳐 이탈리아에는 순교 설교가와 전교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남쪽 유럽 여러나라를 순회하며 옛날의 성 요한 세례자와 같이 세상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권하며 신앙의 부흥에 노력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마르코 성 요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그리고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등이었지만,


이 세 사람 중에서도 특히 사회에 대해서 널리 깊은 감화를 준 이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일 것이다.


 


그는 1386년 이탈리아의 카페스트라노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독일인인 기사(騎士)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요한은 겨우 14세 때에 일찍이 대학에 들어가서 법률을 전공해 26세라는 약관의 몸으로서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Ladislaus)의 신임을 얻어 페루지아 시장에 임명되는 명예를 획득했다.


 


그런데 마침 페루지아와 말라테스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그는 체포되어 말라테스타의 감옥에 갇혔으나


사형선고를 두려워한 나머지 탈주를 결심하고 감옥의 옾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가 크게 다쳐 한때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쪽 발이 부러졌을 뿐 구조되어 재차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발현을 보고 떠있는 구름과 같이 허무한 현세의 명예, 재산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덕을 닦는 자가 되려는 결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곧 많은 배상금을 내고 자유의 몸이 자유의 몸이 된 요한은 약혼한 여성에게 옥 중에서 본 성 프란치스코의 발현과


그와 동시에 가진 그의 성스러운 결심을 말하고 상대의 승낙을 얻자마자 페루지아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방문하고 자기를 받아 줄 것을 원장에게 청했다.


 


이 청을 듣고 지금까지의 요한의 세속적 향락적인 생활이나 심한 명예욕을 잘 알고 있던 원장은


그의 회개가 진실한 것인가를 떠보기 위해 진기하고도 아주 부끄러운 시험을 명했다.


다름 아니라 누추한 차림에다가 그 등에 자기가 범한 죄의 수를 기록한 종이를 붙이고 당나귀를 타고 마을안을 돌라는 것이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현명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1고린 4,10-13)하고 말했지만


요한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깊은 겸손과 순종으로써 원장의 명령을 완수하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그런 시련을 감수, 인내하고 드디어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이같이 처음부터 수도를 위해서는 일체를 버리고 매진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던 그였으므로


덕의 진보에 있어서도 현저하고 장차 하느님께 선발되어 특별한 사명을 받게 된 것에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요한은 수련기를 마치자 철학을 연구해 사제가 되고 유명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같이


이탈리아의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불을 토하는 듯한 설교를 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감동하고 또한 무수한 죄인들이 회개했다.


 


요한과 베르나르디노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1444년 베르나르디노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요한은 허약한 몸이었지만 더 열심히 동료의 몫까지 일하고자


참으로 동분서주 쉴새 없이 곳곳을 설교하고 다니며, 혹은 더위와 싸우기도 하고 성당에 들어올 수 없는 대군중에게는 문밖에서 교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 효과는 성공해 도처에서 감격의 우렁찬 소리가 일어나고 특히 그의 교훈에 의해 분연 회개해서


당시의 악폐이던 도박이나 음란 사치의 해독에서 구제되고 진지한 그리스도교의 생활로 돌아간 사람의 수는 셀 수가 없었다.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은 세상에 드문 성인이라는 평판이 사방에 퍼져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외국에서 초청하기에 이르렀지만,


그 중 독일 방문 때에는 황제 프레드리히 3세가 친히 그를 마중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냉담하고 죄에 빠졌던 신자가 그의 설교를 듣고


다시 열렬한 신앙의 소생으로 올바른 생활로 돌아섰으며 또한 다수의 이단자나 유다인들까지도 그리스도교 진리의 빛을 받고


인류의 자모인 교회의 품안에 들어오게 되고 보헤미안에 있어서는 후스(Huss)파의 이단자만 하더라도 1만 6천명이나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성인이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1453년 터키 황제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여세로 즉시 유럽을 침공해 오스트리아의 빈을 점령하려고 한 때였다.


이때 요한은 이미 70세의 고령의 몸이었으나 전 유럽을 이교도의 손에서 구하려 서양제국의 군주를 격려하여 그리스도 신자의 장병을 규합하고


정의의 전쟁을 일으켜 자기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십자가를 손에 들고 전진했더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틀간의 대 격전 후


마침내 소수의 군대로써 우세한 적군을 격파 궤멸시키고 그리스도교국을 회교도의 유린에서 모면하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2개월 후 요한은 오스트리아 발라크(Villacus)라는 마을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올라갔다. 


때는 1453년 10월 23일이었다. 그는 1690년에 시성되었다.


 



 


축일: 5월 20일.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Saint Bernadine of Sienna(Franciscan)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알려진 베르나르디노는


IHS-예수님의 희랍어 이름 첫머리 세글자-를 빛나는 태양광선에 고딕체로 쓴 상징으로 만들었다.


*게시판1169번,1772번.


 


*예수 성명 축일:1월3일.게시판155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update 2004.10.23.


 


 



 


 


♬Credo-Angel


 


 


 


 


 


 


 


 


 


 


 


 


 


 


 


 


 


 


 


 


 


 


 


 


 


 


 


 


 


 


 


 


 


 


 


 


 


 


 


 


 


 


 


 


 


 


 


 


JOHN of Capistrano


 


Also known as


Giovanni da Capestrano; John Capistran


Memorial


23 October; formerly 28 March


Profile


Son of a former German knight, his father died when John was still young. Studied law at the University of Perugia. Lawyer in Naples, Italy. Reforming governor of Perugia under King Landislas of Naples. When war broke out between Perugia and Malatesta in 1416, John tried to broker a peace, but instead his opponents ignored the truce, John became a prisoner of war.


 


During his imprisonment he came to the decision to change vocations. He had married just before the war, but the marriage was never consummated, and with his bride’s permission, it was annulled. Franciscan at Perugia on 4 October 1416. Fellow student with Saint James of the Marches. Disciple of Saint Bernadine of Siena. Noted preacher while still a deacon, beginning his work in 1420. Itinerant priest throughout Italy, Germany, Bohemia, Austria, Hungary, Poland, and Russia, preaching to tens of thousands. Established communities of Franciscan renewal. Reported to heal by making the Sign of the Cross over a sick person. Wrote extensively, mainly against the heresies of the day.


 


After the fall of Constantinople, he preached Crusade against the Muslim Turks. At age 70 he was commissioned by Pope Callistus II to lead it, and marched off at the head of 70,000 Christian soldiers. He won the great battle of Belgrade in the summer of 1456. He died in the field a few months later, but his army delivered Europe from the Muslems.


Born


1386 at Capistrano, Italy


Died


23 October 1456 at Villach, Hungar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1694


Canonized


1724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 = John)


Patronage


judges, jurists, military chaplains


Representation


man with a crucifix and lance, treading a turban underfoot; Franciscan with cross on his breast and carrying banner of the cross; Franciscan preaching, angels with rosaries and IHS above him; Franciscan pointing to a crucifix which he holds


Readings


Those who are called to the table of the Lord must glow with the brightness that comes from the good example of a praiseworthy and blameless life. They must completely remove from their lives the filth and uncleanness of vice. Their upright lives must make them like the salt of the earth for themselves and for the rest of mankind. The brightness of their wisdom must make them like the light of the world that brings light to others. They must learn from their eminent teacher, Jesus Christ, what he declared not only to his apostles and disciples, but also to all the priests and clerics who were to succeed them, when he said,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is salt goes flat? How can you restore its flavor? Then it is good for nothing bu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Jesus also said: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Now a light does not illumine itself, but instead it diffuses its rays and shines all around upon everything that comes into its view. So it must be with the glowing lives of upright and holy clerics. By the brightness of their holiness they must bring light and serenity to all who gaze upon them. They have been placed here to care for others. Their own lives should be an example to others, showing how they must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rom the treatise Mirror of the Clergy by Saint John of Capistrano


...........


 


 


San Giovanni da Capestrano Sacerdote


 


23 ottobre - Memoria Facoltativa


 


Capestrano, L’Aquila, 1386 - Tarvisio, Villach, Austria, 23 ottobre 1456


 


Giovanni, convertito all’ideale francescano dopo travagliate vicende nell’ambito forense e politico, inizio quel incessante ministero della predicazione che lo porto dalla Terra Santa, ai Paesi Bassi, alle regioni germaniche e slave, cosi da essere chiamato l’apostolo dell’Europa. Spirito intransigente, organizzo i Minori Osservanti, fu consigliere di papi e svolse la sua opera per la difesa della fede e per il rinnovamento dei costumi anche in Italia. Animo la resistenza della citta di Belgrado assediata dai Turchi. Concluse la sua testimonianza di missionario itinerante per una malattia contratta in guerra. (Mess. Rom.)


 


Patronato:Giuristi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e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Dalla data tradizionale del 28 marzo, il nuovo Calendario della Chiesa ha riportato al 23 ottobre, data effettiva della sua morte, la memoria facoltativa di San Giovanni da Capestrano, uno dei due Santi che, nelle opere d’arte del ’400, vengono rappresentati con lo stemma di Cristo Re.


Il primo e San Bernardino da Siena, che mostra lo stemma raggiante sulla tipica tavoletta di legno, da lui alzata su tutte le piazze come simbolo di liberta e pegno di pace. Il secondo e San Giovanni da Capestrano, che sventola invece quel luminoso stemma sopra una bandiera spiegata, garrente nell’aria di una ideale battaglia.


Era nato a Capestrano, vicino all’Aquila, nel 1386, da un barone tedesco, ma da madre abruzzese, e il biondo incrocio tra il cavaliere tedesco e la fanciulla abruzzese veniva chiamato " Giantudesco ". " I miei capelli, i quali sembravano fili d’oro - ricordera da vecchio -io li portavo lunghi, secondo la moda dei mio paese, sicche mi facevano una bella danza ". Studente a Perugia, si laureo e divenne ottimo giurista, tanto che Ladislao di Durazzo lo fece governatore di quella citta. Ma da Perugia si vedeva, sul fianco del Subasio, la rosea nuvola di Assisi, e Giantudesco, caduto prigioniero dei Malaspina, medito in carcere sulla vanita del mondo, come aveva gia fatto il giovane San Francesco.


Non volle percio tornare alla vita mondana e uscito di carcere si fece legare dalla corda francescana, entrando nell’Ordine, dove San Bernardino propugnava, nel nome di Gesu, la riforma della cosiddetta " osservanza ".


Giantudesco entro in intimita col Santo riformatore. Lo difese apertamente e valorosamente quando, a causa della devozione del Nome di Gesu, il Santo senese venne accusato d’eresia. Anch’egli cosi prese come emblema il monogramma bernardiniano di Cristo Re e lo porto nelle sue dure battaglie contro gli eretici e contro gl’infedeli. Il Papa lo nomino Inquisitore dei Fraticelli; lo invio suo legato in Austria, in Baviera, in Polonia, dove si allargava sempre di piu la piaga degli Ussiti. In Terra Santa promosse l’unione degli Armeni con Roma.


Ovunque c’era da incitare, da guidare e da combattere, Giantudesco alzava la sua bandiera fregiata dal raggiante stemma di Gesu o addirittura una pesante croce di legno, che ancora si conserva all’Aquila, e si gettava nella mischia, con teutonica fermezza e con italico ardore.


Aveva settant’anni, nel 1456, quando si trovo alla battaglia di Belgrado investita dai Turchi. Entro nelle schiere dei combattenti, dove era piu incerta la sorte delle armi, incitando i cristiani ad avere fede nel nome di Gesu. " Sia avanzando che retrocedendo - gridava, ~ sia colpendo che colpiti, invocate il Nome di Gesu. In Lui solo e salute! ".


Per undici giorni e undici notti non abbandono mai il campo. Ma questa doveva essere la sua ultima fatica di combattente. Tre mesi dopo, il 23 ottobre, Giantudesco moriva a Villaco, nella Schiavonia, consegnando ai suoi fedeli la Croce, emblema di Cristo Re, che egli aveva servito, fino allo stremo delle sue forze.


 


 


 


Fonte: Archivio Parrocc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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