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마당냥이에게 묻다.
윤승환 사도 요한.
병점 성당에 들렸을 때 나는 마당냥이를 보고 애처로움을 느꼈다.
비에 젖어 샤워한 듯 젖은 하얀 털이 애처로웠다.
누가 일부러 물을 끼얹은 듯 안타깝기 까지한 그 모습.
그런데도 녀석은 내가 쓰다듬어 주자 표정을 바꾼다.
나지막히 우는 울음 소리 고마움의 상징인 듯 아니면 슬픔의 상징인 듯.
아, 너도 기후위기가 심해지면 화성시, 오산시가 절반은 물에 잠기는 것을 아는구나.
빙하의 녹은 물이 너의 털에 스며들었니?
시공을 초월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 녀석에게 던지고 싶은데.
녀석은 작은 몸짓으로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한다.
너희야 아무 일이 없지 이제 5년 1개월의 시간이 남았다는데.
이제 베니스 즉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가 많아질 텐데 좋은 일이 아니니?
녀석은 나의 엉뚱한 소리를 아는 것처럼 아무런 말도 없다.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리게 한 기후위기의 전망 너도 알고 있느냐?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다는 시각이 5년 1개월 뒤로 다가왔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그깟 기후위기가 무슨 대수야 무슨 문제야?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에 젖어 빗물 투성이가 된 이 하얀 새끼고양이를 보여 주고 싶다.
서서히 성모자상에 절하고 돌아가는 내 발길이 무겁기만하다.
그런데, 마당냥이 하얀 고양이야 너는 알고 있었느냐 지구의 위기를?
문득 하늘을 보고 탄식하며 손에 든 원두커피의 씁쓸함을 느낀다.
한 천주교신자이자 그리스도인 중의 한 작은 자로서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
2019년 말기 세상을 강타한 코로나19 만연과 창궐은 인류가 각자도생의 삶을 버리고 단합된 모습과 다름이 틀림이 아닌 세상에서 사는 세계시민적 사고방식과 동시에 다른 나라, 다른 지역의 삶을 이해하고 참아주는 사회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하느님과 자연 앞에서 겸손하면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창궐이 잦아들 즈음하여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하고 있는 가자지구 전쟁으로 인류는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헤게모니 다툼의 수단이 되고 인류 앞에는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 그리고 그밖의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으면 해결에는 적어도 수십 년이 걸리며 즉 20~30년이 족히 걸리게 될 거라는 어두운 전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의 말처럼 추억과 경험의 공유는 새로운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명심 또 명심해야겠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