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을 알아보고 스콧 니어링을 알아 보면 과연 자유로운 삶과 지식인들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 기인들은 기존의 가치관을 깨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였습니다. 러셀은 그 유명한 [광신의 극복]이라는 글과 훗날 자신의 백작 작위와 생명마저 위태롭게 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글에서 실천적인 믿음 즉 자아 혁신을 통한 인도주의적 삶과 인문주의적 삶을 강조했고 결국 이단아로 몰려서 여러번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유엔은 결국 그와 같은 세계정부 지향의 지도자들 덕분에 어는 정도 구색을 갖출 수도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스콧 니어링은 거의 무소유의 삶과 언행일치를 꾀한 사람이었고 당시에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연설이나 강연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러셀식의 돌풍을 잃으켰고 그는 단풍나무를 이용하여 그것을 가공하여 아내와 살면서 꼭 필요한 만큼만의 생산과 판매, 소비로 거의 자급자족과 무소유의 삶을 살고자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아내가 가장 확실한 동료이자 내조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삶과 어떤 지향을 두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세계정부나 언행일치를 떠나 가장 충실히 여겨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동시에 자신이 꿈꾸고 기획하는 삶에의 충실성에 방점을 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고 지옥에도 천국에도 합당하지 않고 연옥에도 갈 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게 되는 성목요일 저녁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한 천주교신자이자 그리스도인 중의 한 작은 자로서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