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28일 나는 국가의 부르심을 받고 집을 나서서 의정부 301 보충대로 가기 위하여 철길에 올랐다. 머리는 완전히 깍은 상태였고 곧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왼팔이 부어오르기 시작하였더니 나중에 이틀하고 삼일을 훈련소 의무실에 입소하여 그곳에서 다시 나의 훈련소대에 복귀하여 기간을 채우고 나서 자대인 보병 101여단에 1대대 1중대에 배치되었다.
군대 생활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나는 몸이 건강한 상태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다. 사실 아픈 아버지를 입소 하는 날까지 돌보아 드려야 하였다. 그리고 보충대에서 헌혈을 하였는데 내가 지혈을 잘못하였는지 팔이 한 쪽이 퉁퉁 부어서 나는 흔히 말하는 풋샵까지 하기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상황이 매우 좋지가 않았다.
그뒤 나는 나중에 군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익숙하여질 무렵 제대 명령을 받았다. 의가사 즉 집으로 돌아가서 가정을 돌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집안의 상황이 심각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전방의 상황을 기억한다. 남과 북의 확성기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그런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군 생활이 10개월로 끝난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일병 4호봉 때 제대를 한 것이었다.
그래도 기억한다. 동기 정영희 병장, 나는 그 당시 전중인 일병의 아래였고 그 위에 홍승용, 이정용, 박상현, 박상엽, 박민, 신철기, 김영준, 그리고 나의 후견인 노릇을 하였던 김명팔 병장, 김병수, 이수재, 김경수, 강명혁, 서영주 등의 병사들과 이병호 중사와 김재룡 인사계 상사, 그리고 소대장과 한성주 대위, 그리고 대대장님과 그 밖의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아마도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양승현 하사와 윤영호 하사,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막내 라헌룡 이병, 고광호 일병, 구자명 일병 그들도 나의 후임이었다.
제대 후 나는 동기인 정영희 병장이 제대할 때까지 매주 2~3통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보니 그곳 오두산 근처에는 가 보지 못했다. 지금은 자유로가 뚫려서 시원히 길이 열렸는데 그때는 파주 그 지역은 매우 위험하였다. 이제는 그 사람들과 그곳이 많이 변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이틀 간 편히 근무를 하고 나중에 나는 여단 보충대에서 다시 이틀을 전역대기하고 이른바 전대를 하고 나서 소집이 해제되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는 우리나라 전체가 매우 혼란하였다.
그리고 그 근처에 유명한 성당 "참회와속죄의성당"이 있다. 한 번인가 들린 적이 있다. 그 성당에서 우리는 피정을 하였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아, 언제 나의 벗들이었던 그들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 그 임진강 건너편에 있는 우리 반쪽의 피붙이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너머의 통일은, 그때 그날은 언제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한 천주교신자이자 그리스도인 중의 한 작은 자로서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