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버지께서 우체국장으로 근무 중 연탼가스에 노출되어 가스 중독으로 몸이 마비되어 치료를 여러 차례 받으셨으나 그 뒤 27년을 치매에 시달리며 사셔야 하였습니다. 저는 결국 나중에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집에서 돌보아야 하였으나 아버지는 자주 집을 잊어 버리시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고향 전주에서는 오래 살던 집이 없습니다. 스무 번 가까이 이사를 하여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연세대학교에서 학창 생활을 할 무렵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셨다가 다시 저의 집으로 우리는 다시 모셔 왔고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은 화성시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다시 요양원에 가시기까지 저의 가족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나중에 저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우리는 다시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고 자주 찾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뇌졸중이 오시자 우리 가족은 그분을 치료하러 큰 병원에 모셨다가 다시금 차도가 없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년 6개월을 더 집에서 병자 전용 침상을 사서 간병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욕창이 와서 더 이상 모실 수가 없게 되자 우리는 그분을 다시 큰 병원에 모셨고 다시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두 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도지사로부터 효행부분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가난한 형편에도 아버지를 잘 모시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속을 썩히기도 한 너무 조숙한 아이여서 조금 후회가 될 때도 있습니다.
화성시에 대하여 아시는 분은 잘 아실 것이고 모르시는 분은 또 잘 모르실 것입니다. 바로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알려진 고장입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의 이야기와 연쇄살인마 이춘재의 진범 자백으로 또 한 번 유명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윤성여 씨는 참 안타까운 경우이기도 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곳의 병점동에서 살고 있지요. 그런데 재미있던 것은 제가 군대에 다녀온 그 즈음에도 그곳은 아주 살벌한 소문이 감도는 곳이었고 사건이 발생한다 싶으면 전투경찰들이 최대 몇 만명까지 깔리기도 하는 곳이었던 고장입니다. 저도 불심검문을 당한 적도 있고 제가 누님의 작은 학원 아니 공부방이라고 볼 수 있는 곳에서 가르친 저의 제자가 그 사건의 피해자 즉 희생자 시신을 발견한 최초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흔히 봅니다. 각설하고 지금은 살기 좋고 부유한 도시이자 특례시를 바라보는 도시로 소문이 났지만 그때는 정말 그곳 아니 이곳이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곳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웃기기까지 합니다. 좋은 추석 명절의 첫날 저녁입니다. 신용이 중요하다고 하는 세상이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 관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시각에도 덕담을 나누시며 좋은 먹거리와 정성스런 주전부리라도 나누는 건강들 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한 천주교신자이자 그리스도인 중의 한 작은 자로서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