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세상이 한창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 문제로 시끄러울 때 저의 집에도 한 가지 안 좋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저는 한참을 깊은 슬픔에 빠졌고 준비하였던 진해 해군기지로의 입영을 취소하여 해군 장교로서의 길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막노동과 여러 가지 일들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른 바 저의 전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우선 저는 근처의 수원의 서울농대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수원역의 인쇄소에서 작은 팜플릿을 만들어서 그것을 나누어 주며 전교를 하였습니다. 그 때의 것이 바로 이 등대라는 전교지의 탄생이었습니다. 그것은 크기는 소바닥만한 것으로 접어서 볼 수도 있고 그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교의 옹호의 내용과 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앙 생활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지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약 한 달 이상을 전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탄절에 마치고 나서 그 즈음 취업을 준비하여 당시의 한보그룹에 들어가서 직장 생활을 잠깐 하였으나 그 시기에도 전교는 잊지 않고 조석으로 하였고 또 그 당시에 종교활동은 지하철에서 보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서울의 대치동 은마아파트까지 출근하면서 전교지와 팜플릿으로 전교를 하였고 서울의 명동성당에 가서 구입한 성화 카드로 전교에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좌천이 되어서 충남 당진의 기지시 근처로 쫓겨 나게 됩니다. 당시 당진에는 한보그룹의 제철소가 있었고 저는 그곳의 하역관리팀에서 관리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전교는 계속 이어졌고 저는 그 즈음 준비하였던 가톨릭교회로의 입문을 꾀합니다. 그리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서 수원 즉 화성의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금 모든 것을 걸고 서울의 신촌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저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근처의 서강대 근처의 고시원에서 숙식하며 당시의 서강대학교에 처음 생겼던 수도자 대학원에 등록하고자 노력하고 낮에는 전교하고 밤에는 알바를 하며 부지런히 보냅니다.
어떤 알바를 하였을까요? 일본어를 가르치는 학원의 교제를 풀이하는 알바를 하였던 것이며 제가 일본에 가서 전교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는 당시의 서울의 대부분의 지하철역을 다 돌아다니며 수도권의 대부분의 전철역을 돌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5678도시철도는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사기를 당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와서 병점의 본당에서 다시 세례를 받습니다. 1997년 10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에도 저는 전교를 계속하였고 직장에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사동료들이 저를 안녕리예수라며 이야기를 하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즈음 저는 매우 탈진하였는데 바로 제가 전교와 캠페인에서 말하였 듯이 파국 즉 IMF 환란이 일어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결국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1998년 4월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기를 1996년 10월부터 계산하여 그때까지의 초기수련기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다른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천주교신자이자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