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자신을 완성하면서 만들어 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은 훌륭한 신앙인 즉 성인의 모습이지 메시야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산다면서 바라야 하는 것은 참 제자의 모습이지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초인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평신도 사도직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사도직에는 기도의 사도직, 전교의 사도직도 있고 봉사의 사도직도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성인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인들의 무리를 성도(saints)라고 부르는 것을 신약의 서간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신앙인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과 복음과 거룩한 전승에 충실한 사람들을 말하는 말하는 것이며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성경 말씀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성서가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인들의 전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시성(canonization)이라는 것이 바로 정경(canon)과 어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육 간에 건강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면서 남에게 자신의 말이 성경의 진리이거나 뭐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우상화하고 절대시하여서는 안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 시성식을 검토하고 심사하였을 때 그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이 100여 건이 넘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는 또 어떻습니까...? 그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도 상당하였을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이 지상 생활 중에 행하셨다는 33건의 기적보다 많다고 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도 이상한 일을 많이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가 그리스도나 하느님이나 그 밖의 존재보다도 낫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삼위일체의 영이 즉 하느님의 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이 자신들이 스스로를 교회이고 성도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동기가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유명해지고 위대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으면 우쭐대고 잘난 체를 하지만 현자는 이를 극복하고 초심을 유지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악인은 아니 죄인은 이익과 칭찬에 민감하고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기도하지만 의인이나 선한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비판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실수나 실패나 허물을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회개를 한다는 것은 실수나 실패나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되찾고 한계를 인정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봉사하는 척하고 돈과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고 이성을 지배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이야기하며 남들을 괴롭히고 노예화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악랄하다 못해 사악하고 악독한 무리들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IS(다에시)와 알 카에다, 탈레반, 그리고 그 밖의 근본주의적 단체들과 극단주의자들이나 폭력에 호소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완전히 정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상의 평화는 결국 이 세상에는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간이 필요하며 결국 우리는 해 낼 것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고맙습니다...!
한 천주교신자이자 그리스도인이며 장애인 활동가로서 윤승환 사도 요한 올림.
자신 안에 꼬맹이가 살고 있는지 아니면 어른이 살고 있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저는 어떠고 여러분은 어떤가요...? 한 번 정도 생각하여 조신을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