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일 루카 2,22-40
“봉헌생활의 날”
아기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주님께 봉헌되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율법에 충실한 분이었고
자기 형편에 따라 가난한 이들이 바칠 수 있는 비둘기를 제물로 바쳤다.
봉헌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봉헌을 받아들이는 이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원의이다.
교회는 매년 2월 2일을 봉헌생활의 날로 정했다.
예전에는 축성생활의 날이라 했는데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의 삶을
더 의미깊게 하려는 뜻에서 봉헌생활로 바꾸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수도자들의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축성해주시는 생활이기에
축성의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교회 내에는 교계제도와 함께 많은 영적 그룹들이 있어
교회의 보이지 않은 보화를 일궈왔다.
한국 교회는 수도회와 교계 중심의 비율이 비슷한 다른 나라와 달리
매우 교계적이다.
이는 일사불란한 사목과 일목요연한 교구 행정, 신자들의 일원화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교구는 특성상 사목중심일 수밖에 없다.
사목중심일 수밖에 없는 교회를 수도회의 많은 영성들이
교구와 신자들에게 영적인 살을 붙이고
신앙을 융통성 있게 접목하고 다양한 변화들을 시도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영의 움직임을 어떻게 느끼고 들여다 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회의 구성원들인 수도자의 삶은
교회의 보화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며 갈망의 비전이다.
물론 모든 수도자들이 모두 영성적이라거나 영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도자들의 삶이 바로 이 시대의 가장 합당한
하느님 나라의 보이는 표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봉헌생활의 날에
수도회의 영성적 삶을 본받고자 하는 많은 3회원들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세속에 살면서 세속의 부딪침을 순화시키며 하느님께 서약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들.
수도자들의 봉헌과는 다를 수 있으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꼭 다르다고 말 할 수 없는 삶이
바로 재속 3회원들의 삶이다.
봉헌은 자기 의지의 포기가 선행되어야 하고
자기 의지의 포기는 주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오히려 수도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일 수도 있다.
무늬만 봉헌생활을 입고 있지 않기 위해
부단한 자기 성찰과 영적인 유대를 지속해야 하는 재속3회원들의 봉헌 의지는
조금씩이라도 교회 쇄신에 이바지 할 것이다.
아직 영이 덜 자라 서투를지라도 결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신성함이
바로 재속 3회원들의 삶이다.
영으로 행복할 수 있음을 믿고 기꺼이 자신을 주님께 내놓은 사람들.
때론 무엇하나 교회를 위해 획기적인 것을 내놓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을지라도
현존 자체로도 귀한 존재라 생각한다.
평신도들이 완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포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재속3회원들의 삶이 그 증거가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현대에도 재속3회원들의 숨은 봉사와 교회 사랑은 평신도들이 어떻게 영성생활을 하는지,
어떻게 세속에서도 봉헌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징이 될 것이다.
교회의 쇄신은 언제든지 아래로부터 시작될 때
그 꽃과 열매를 맺었던 것을 생각하면
평신도 재속3회원들의 삶은 내적으로는 영으로 굳건해야 하고
외적으로는 보이는 표징이 되어야 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바로 재속3회원들을 이 시대에 초대 하셨고
당신의 협력자로 끊임 없이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