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십시오. -------(이 재민 신부님)
교리교사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교리에 의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일부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이 교리 교사를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지만,
성직자나 평신도 교리교사를 막론하고
교리수업을 받은 예비자들이 교리에 대해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론에 대한 교리보다는 예비자들이 이를 듣고 어떻게 깨닫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교리 교사로서 반성을 해야 한다.
우리는 예비자 교리시간에 교리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설명한대로 그러한 교리가 그렇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의 경우 우리는 단순히 증명하기위해서 바쁘다.
중요한 것은 정말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 부활의 경우에도 증명하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내가 설명하기 전에 과연 예수님이 그렇게 부활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
그 외 하느님의 존재증명 등 다른 교리도 모두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냐고 질문을 하다보면
“내가 나의 생각 안에 가두어져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우리는 교리교사를 하기 전에 이 점을 반성해야한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거의 반성 없이 활동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예비자에게 “하느님을 믿어라” 라고 하면서
정작 내가 믿어라 라고 말하는 방식대로 믿도록 가르치고 있다.
즉 나의 생각을 믿어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해 신앙적인 반성이 있어야 한다.
반성이 없으면 인간들이 말하는 언어의 장난에 불과하다.
신학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는 데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라고 하는데 무엇을 가르쳤는가?
예수님이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라고 가르쳤는데 그 가르치시는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이 “하느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하실 때 적어도 이를 교리화 시키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거룩한 것처럼 여러분도 거룩하여라”.
“하느님이 완전한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하여라”라고 말하셨다.
즉 예수님은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치신 것이다.
성경에 하느님을 증명한 문구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결국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로 끄집어내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는데
과연 우리가 생각한대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저는 과거 “옛날의 금잔디” 노래를 할 때
그 노래에 나오는 메기를 물고기 메기로 생각하였다.
그 노래를 부르면 자연스럽게 물고기 메기 생각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메기가 한 소녀의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노래 작사자의 의도와는 달리 메기를 물고기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신앙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물고기의 메기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느님의 의도와는 달리 나의 생각 안에 갇혀있지는 않은가?
작가의 의도와 달리 다르게 생각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하느님의 생각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우리의 교리도 무조건 우리의 머릿속에 심어놓고 가르칠 때
단순하게 출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과연 “베드로가 생각하는 방식에 의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었는가?
그때 베드로의 생각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되어있는 그리스도였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힐책하셨다.
바로 이 베드로는 연약한 우리 인간들의 대표이다.
오늘 뜨겁게 신앙을 고백했다가 다시 되돌아서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연역한 사람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즉 지도력이 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고
연약한 사람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예수님은 연약한 존재인 세리. 창녀 등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 모았으며
이러한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다.
예수님이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성직자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연약한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를 세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신학은 언어로 나타나는데 언어의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알고 있는데 과연 삼위일체를 깨달았는가?
삼위일체를 증명하기위해 여러 가지 증명을 한다.
자기 나름대로 증명을 하다보니까 나름대로의 이론을 적용시킨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삼위일체는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삼위일체라고 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풀어서 증명을 하다보면 안되니까
나중에는 무조건 믿어라 라고 말하게 된다.
“무조건 믿어라” 우리의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우리는 이를 위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예화를 많이 적용한다. 우리의 믿음이 이 정도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영원한 삶에 대한 신앙을 뜨겁게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뜨거운 기계에 불과하다.
단순히 머리속에 입력했다가 출력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순한 기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엇이 교리를 가르치게 하고 있는가?”이다.
이는 바로 우리의 원초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바로 이 체험이 교리를 설명하게 해야 한다. 우리 믿음의 원천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믿음의 원천은 암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야 한다.
잘못하면 불교는 깨닫는 종교이고
우리는 무조건 믿는 종교로 말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그러면 또 믿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다.
즉 믿음의 원천인 예수님의 복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핵심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고 복음화이다.
즉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맨 먼저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화 율을 흔하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복음화 율을 10%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10%가 복음화 되었는가?
이 세상에 예수님과 마리아만이 복음화 되어있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다 덜된 인간이다.
복음화라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복음은 신앙의 바탕이며.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이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다” 의 경우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과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너무나 다르다.
예수님이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신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예수님은 5천명 이상의 사람을 먹이시고 산에 머무르고 계셨으며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에 와 있었다.
예수님은 기도를 하다가 그 이튿날 물위로 걸어오셨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물위로 가다가 빠지게 되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이 믿음이 약한자야”라고 하셨다.
바로 이때 무엇을 믿어야 베드로는 물에 안 빠졌을까? 우리는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에 안 빠질 것이다”라는 것을 믿으라는 믿음이 아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 것은 “하느님 나라 천국이 이 세상에 왔다”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이 죽어서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나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천국을 어떤 장소 개념으로 생각하고,
부활한다는 것은 무덤에 묻혔다가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이러한 생각을 바꾸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기위해서는 인생을 팔아라. 권력 돈 명예 등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라.
너의 존재를 다 팔아서 그 보물을 사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 팔고 살다가 죽고 나서 천당에 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세상 안에 와 있다.
이는 “하느님은 당신의 전부를 이미 이 세상에 베푸셨다” 는 뜻이다.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밭에 묻힌 보물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를 보는 다른 일반 사람들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이기적이다. 천당 가기위해서 좋은 일을 한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천당가기위해서 도와주는 사람으로 잘못 생각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비판했다.
당시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비판하셨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 안에 와 있다”를 강조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모든 사람들안에는 겨자씨라고 하는 천국의 씨앗이 있고 이것이 점점 자라서 나무와 같이 된다.
이 나무는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점점 자라간다 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어떠한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은 함께 하고 계신다”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베드로의 믿음이 약한 것은 물에 안 빠진다는 믿음이 아니고,
“하느님이 죽음의 상황에서도 나와함께 계신다”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나다”라고 말하셨다.
성경에서 “나”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말한다.
“나는 야훼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고생할 때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들을 떠난 존재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모세는 “우리가 고생하는 중에도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다”라는 생각을 백성들에게 깨우쳐주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고통 중에도 항상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의 원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안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복음의 대상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즉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안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안 내리셨는가?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은 모두 헛되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에서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안 내리신 것이다.
복음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라는 것으로,
죽음의 십자가 고통 중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인데
이것이 안 되면 복음 선포는 헛된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이 없다는 것도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순간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며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꾸짖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병자에게 “너 믿느냐?” 고 물었을 때 “믿는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병이 낫다.
그러면 이때 무엇을 믿는가? 나를 낫게 해주실 것으로 믿는 것인가?.
즉 “병이 낫고 치유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치유된 것인가?
그게 아니다.
이때의 믿음은 바로 “병자 안에도 하느님이 계시다” 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한 세상을 마치고 다 죽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이 약해서 다 죽었단 말인가? 아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병이 낫고 안 낫고의 믿음이 아니고 “병의 고통가운데서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을 믿느냐 하는 것이다.
병이 낫을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고통가운데에도 “주님이 계시다” 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게 되면 죽든 살든, 아프든 안 아프든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
즉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라는 것이
죽은 이후 어떤 시간이 지나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살아도 죽어있고 죽어도 살아있다” 는 것은
모든 삶 가운데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결국 예수님은 바로 “현재 이곳에서 하느님이 계시다” 는 것을 믿고 살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것인데
이를 믿는다는 것은 먼 천국에 가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병이 을 것을 믿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죽는 순간에도 “주님이 계시다” 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고통과 실패 속에서도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병이 낫는 다든지 성공을 하는 것 등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공한 분이 아니다. 만일 성공했으면 우리는 안 믿는다.
십자가에서 다시 내려와서 살으셨다면 이것이 성공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잘 안될 때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기 위해서 주님이 내린 은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반성을 해야 한다.
예비자 교리교사는 단순한 교리를 입력해서 출력하는 것이 아니다.
교리를 예비자에게 가르치기 전에 나의 신앙 자세를 반성하는 것이 먼저 선행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한 교리를 암기하고 이것을 출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의 전부를 이 세상에 전달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이 계시한 장소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이며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이 세상에 전달하셨다" 는 것을 믿는 것은
나의 삶에서 좌절하거나 실패했거나를 막론하고,
또한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 등 이 세상의 수많은 고통 안에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모든 이 세상의 삶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 는 것을 믿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모든 인간 세상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결국 믿음은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인생의 삶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삶 안에 하느님이 와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의 자세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복음화라고 하는 것도
내가 “모든 다른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또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믿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복음화는 우선 자기부터 복음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부터 복음화 된 후 다른 사람을 복음화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교리교사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올리신 글을 통하여 부활축일에 새오운 깨달음을 주시어 고맙습니다 .
'깨닫고 실천하는 신앙 ! ,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도록 은총구합니다 .
고마운님 , 평화로운 축복 받으시길 ... !